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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간 인연을 한 번 되새겨 보잔 취지에서 각 음식들엔 특가가 매겨집니다.

한식

회

일본에 파급되거나 고유성을 갖춘 한식은 시가보다 할인된 값에 제공되지만 일본영향이 뚜렷한 우리음식의 경우 외려 가격이 할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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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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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

제국주의 일본이 남기고 간 대표적인 맛의 흔적이 바로 ‘안팡’(あんパンㆍ餡パン) 즉 단팥빵입니다. 소가 들어간 만두를 떠올리게 하는 이 빵은 일제 당시 다른 서양 빵보다 훨씬 급속히 일본인들 사이에서 퍼졌는데 그 인기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팥의 단맛이 서양 빵의 익숙지 않은 맛을 동양인들이 친숙하게 느끼도록 유도했던 거죠. 하지만 제빵술까지 조선에 남진 않았고 일제가 나간 뒤 기억을 더듬어 만든 게 지금 단팥빵입니다.

군산 명물 ‘이성당’ 전신인 이즈모야 제과점의 1910년대 모습. 동국사

한반도에 일본식 빵이 본격 유입된 건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문을 열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입니다. 그러나 식민지 대중이 맛 보기엔 값이 워낙 비쌌습니다. 자기네끼리 편하게 즐기려고 가게를 세운 거죠. 당연히 빵 만드는 법을 반도인들한테 가르쳐주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유명한 빵집들은 일본인 소유 제과점 옆에서 하코방(판자집) 같은 가게를 하다 일제가 철수하며 남긴 점포를 불하 받은 경우가 많죠. 전북 군산 ‘이성당’도 그렇습니다.

1950-60년대 설탕 포장지. 해방 후 일본 공장의 유산으로 제당 산업이 시작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요즘 한창 성가가 높은 설탕의 계보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에 닿습니다. 단팥빵과의 협공으로 조선인들을 단맛에 홀리게 한 셈이죠. 일제는 자국이 복속시킨 오키나와ㆍ대만 등 식민지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로 제당 사업을 벌입니다. 설렁탕집 깍두기에 엿과 꿀 대신 설탕을 넣기 시작한 것도 일제 때입니다. 돌이켜 보면 5년 전 시청자들 이목을 집중시킨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주인공이 공들인 빵도 단팥빵이었죠. 씁쓸한 단맛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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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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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빙수

팥과 떡 등 곡물로 된 토핑(고명)이 얹히고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이른바 ‘한국형 팥빙수’가 인기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했던 한식 세계화 전략에도 힘입은 바 크단 분석입니다. 하지만 빙수는 제국 시절 일본이 처음 만들어 판 음식입니다. 오키나와ㆍ대만 등 식민지에서 재배된 망고ㆍ바나나 등 열대과일과 설탕으로 시럽을 만들어 잘게 부순 얼음 위에 얹은 자국식 빙수 ‘가키고오리’를 일본이 속국에 퍼뜨린 건 제국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1920년대 한강에서 천연빙을 채취하는 장면. 이 때까지 음료용 얼음 대부분은 천연빙이었다. 주영하 '식탁위의 한국사'

물론 현재 우리가 즐기는 팥빙수에 가키고오리의 특징이 고스란한 건 아닙니다. 시럽 이외 다른 요소를 최소화한 일본식 빙수와 달리 한국식 빙수엔 각종 먹을 거리가 듬뿍 올라갑니다. 대표적인 게 팥 같은 곡식류입니다. 이와 관련해선 다양한 해석들이 나옵니다. 곡류를 먹어야 잘 먹었다고 여기는 우리 특유 ‘허기 트라우마’가 작용했거나 ‘비빔밥 문화’가 배경일 수 있단 겁니다. 얼음뿐인 음식을 돈 주고 사먹기 아깝단 본전 생각 영향도 있겠죠.

대표적 여름 외식거리였던 빙수를 파는 가게의 모습. 동아일보 1938년 5월 13일자

일제 강점기 당시 빙수와 함께 조선에 이식된 건 외식 문화입니다. 농경 사회인 조선엔 외식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숙박하면 공짜 밥이 딸려 나오는 주막을 외식업체로 보긴 어렵죠.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오면서 경성(서울)에 빙수집이나 면옥 같은 대중 음식점들이 생겨났는데, 1920년대 초반 경성에서 영업하는 빙수집이 400곳을 훌쩍 넘었단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 부유하지 못했던 대다수 조선 서민에겐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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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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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조선에서 냉면은 본래 겨울 음식이었습니다. 늦가을에 거둔 메밀을 가루로 만들어 면을 뽑고 차가운 동치미나 오미자 국물을 부어 따뜻한 온돌방에서 먹었습니다. 여름에도 이 전통 음식을 먹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들어서입니다. 근대적 제빙 기술이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일제가 들여온 외식 문화가 퍼지면서 경성(서울)에 면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20년대 말 서울 청계천 북쪽에만 40곳 넘는 냉면집이 성업했다고 합니다.

메밀 국수 내리는 모습을 담은 19세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국수 누르는 모양’. 독일 베를린민족학박물관 소장

냉면 대중화의 다른 배경은 일제의 수탈입니다. 제국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가져가기 위해 조선의 농업과 기타 산업들을 정비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바뀐 조선 음식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게 냉면입니다. 자국 군인들한테 보급할 군수물자로 활용하기 위해 일제가 조선우 사육을 장려했고, 소고기 생산량이 늘면서 소고기 육수를 쓰는 냉면 소비도 많아진 겁니다. 소를 쓰는 설렁탕과 불고기가 보편화된 시기도 이때입니다.

냉면 육수를 우릴 때 사용하면 맛이 좋아진다는 내용이 담긴 아지노모도(MSG) 광고.
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자

일제가 식민지 국가들에 전파한 화학 조미료 MSG(L-글루탐산일나트륨)도 냉면 상업화를 부추긴 요소입니다. 일본 조미료 회사인 아지노모도사(社)는 20~30년대 조선에서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는데 타깃이 냉면집이었습니다. 냉면 국물에 MSG를 넣으면 편하게 육수 맛을 낼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이 회사는 27년 평양 대동문 근처에 냉면집을 직접 열 정도로 시장 공략에 적극적이었는데 20년대 말부터 냉면이 사철 음식이 되는 건 저 영향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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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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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

잔치국수는 밀가루 국수를 멸치를 우려 만든 국물에 말아 만든 소면을 이릅니다. 멸치국수인 셈이죠. 고기붙이를 넣지 않고 국수 위엔 얇게 부친 계란 지단과 김ㆍ호박 등을 고명으로 얹는 게 통상적인 조리법입니다. 고명 없이 국물만 부어 먹거나 겨우 양념장 정도만 곁들이기도 합니다. 요즘엔 공장에서 기계로 뽑아 말린 마른 국수를 슈퍼마켓에서 손쉽게 구할 수도 있어 가정에서 간편히 만들 수 있습니다. 대중 음식점에선 장터국수로도 불립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 국수가게에 '종이술'이 달려있는 모습. 작자ㆍ연도 미상

저 소박한 음식이 보편화한 건 일제 강점기 이후입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건면(乾麵) 생산 공장을 지어 면 요리 대중화 토대가 마련된 데다 당시 한반도에서 본격 밀 재배가 시작되고 1930년대 이후엔 중일 전쟁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한 일제가 만주산 밀도 손에 넣으면서 밀마저 흔해진 결과입니다. 한국전쟁 이후엔 밀국수가 완전히 정착하는데 원조되거나 저가에 수입된 밀가루 덕이죠. 여기에 말린 멸치로 낸 일본식 육수를 부어 먹게 된 겁니다.

‘국수갓튼대쓰시면 놀내실만큼 마시됴슴니다’는 겨자 광고를 통해 국수가 흔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22년 9월 1일자

원래 잔치국수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호사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땐 밀이 귀해 혼례나 생일ㆍ환갑 잔치라도 있어야 서민들이 밀국수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길다란 면발처럼 신랑ㆍ신부의 화목한 결혼 생활이 오랫동안 이어지라거나 생일을 맞은 이라면 장수하란 기원을 잔치국수에 담았습니다. 이렇게 잔치 때나 가끔 해먹던 음식을 일제를 거치며 아무 때나 쉽고 싸게 먹을 수 있게 된 건데 정작 일본엔 저 국수가 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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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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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전통적으로 음력 정월 대보름에 먹던 복쌈(김이나 배춧잎 같은 넓은 잎에 밥을 싸 먹는 쌈 요리)에서 유래했단 설도 있지만 일본 후토마키(김초밥ㆍ 太巻き)가 한국 김밥의 원형이란 게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김의 대중적 소비가 가능해졌고 발로 말아 만드는 방식이 후토마키의 전형적 제조법이란 게 근거입니다. 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김밥이 한국 이름 그대로 일본 열도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까요.

일본 에도 시대 화가인 안도 히로시게(1797~1858)의 목판화. 초밥과 함께 후토마키가 보인다. 작자미상

일제가 조선 음식에 큰 영향을 미쳤단 건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모든 면에서 제국이 우월하고 식민지는 열등하단 생각이 지배하던 때였으니까요. 일식이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파된 것들을 우리 민족이 그대로 수용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대물림해 온 미각 기준에 맞춰 변형하기 십상이었죠. 대표적인 게 김밥입니다. 더 다양하고 맛있게 발전시킨 경우죠. 초밥을 버리고 김밥 안에 넣는 재료를 철저히 한국식으로 맞췄습니다.

《할팽연구》에 소개된 노리마키스시 마는 방법. 후토마키와 함께 김밥의 시초로 본다. 주영하의 '식탁위의 한국사'

1990년대 등장한 김밥 전문점은 한국 특유의 소비 행태를 반영합니다. 일본에선 이런 음식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치즈, 참치, 김치, 누드 김밥 등 김밥 종류를 다양화하는 데도 저 전문 식당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초밥의 일종으로 생선과 야채, 과일 등 온갖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캘리포니아 롤’ 역시 김밥에서 갈라져 나온 음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맨 김에 밥만 손가락 크기로 싸 무김치ㆍ오징어무침을 곁들여 먹는 충무김밥도 유명한 김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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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장어(1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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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장어

갯장어는 일본인들이 최고로 여기는 생선입니다. 일본어로 하모(はも)인데 아무나 잘 문다는 뜻의 ‘하무’에서 유래했습니다. 갯장어의 ‘개’도 개처럼 잘 문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갯장어를 가다랑어포 육수에 슬쩍 익혀 숙회로, 우린 탕으로 각각 즐겼습니다. 입맛 까다로운 일본인들이 세계 제일로 꼽는 갯장어는 전남 고흥산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맛본 게 계기였죠. 이상야릇한 생선이라 여겨 이 생선을 꺼리던 조선도 일본을 따라 먹었습니다.

조선인 부부가 어시장에서 장 보는 장면. 장어는 인기가 없는 생선이었다. 동아일보 1929년 6월 15일자

일본은 새로운 어업 기술과 자본을 내세워 조선 바다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수산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엔 아예 조선총독부가 직접 나서 한반도 어업 지도를 그렸습니다. 거점마다 어항 시설을 갖추고 어장을 개발했습니다. 함경의 명태와 강원 정어리, 전남 김, 경남 붕장어, 전남 갯장어 식으로 지역별 어종을 특화, 생산성을 높였습니다. 판로 확보 용이를 위해 어종 개발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생선 위주로 이뤄졌습니다.

아낙들이 잡은 명태를 살피고 있다. 명태가 대량 어획한 건 일제강점기때다. 동아일보 1939년 4월 28일자

제국의 권력은 식탁도 지배했습니다. 생선을 나눠 갖는 데 힘의 논리가 작용한 거죠. 일본이 맛있다 여기는 명태의 알(명란)을 가져가고 남은 생선은 동태ㆍ북어ㆍ황태 등으로 만들어 조선이 먹는 식이었습니다. 갯장어처럼 과거엔 안 잡았던 수산물도 먹게 됐는데, 김 양식이나 멸치잡이도 그 영향입니다. 일본의 자본가들은 조선 앞바다에선 무법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민어, 정어리, 전복 등 입맛에 맞는 생선을 싹쓸이했고, 그래서 생선 씨가 말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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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1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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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

일본 야키니쿠(燒肉)와 우리나라 불고기는 ‘형제 음식’으로 여겨집니다. 얇게 저민 소고기를 달짝지근한 간장 양념에 재워 뒀다 굽는 조리법이 공통적이어서죠. 양념법은 일본 스키야키(소고기에 파 등을 섞어 간장으로 맛을 내는 냄비 음식)에서, 불에 익혀 먹는 방식은 한국에서 각각 유래한 걸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런 상호 관여는 1900년대 초 일제 강점기 때 이뤄진 걸로 보입니다. 이후 한일 두 나라 대중 입맛에 맞게 분화ㆍ발전한 거죠.

숯불을 피운 화로 곁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고기 대중화 분위기는 당시 양국에서 모두 무르익었습니다. 1,200여년 동안 금지됐던 육식이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허용됐는데 서양인처럼 체격을 키워야 한다고 정권이 판단해서였습니다. 농경 사회였던 조선에서도 자산인 소를 농민들이 일상적으로 잡아먹진 못했습니다. 일제가 군수물자로 쓸 소가죽 확보를 위해 식용우 사육을 장려하면서 도축이 활발해지게 된 거죠. 생소한 누린 맛을 최대한 줄여야 한단 건 양국 공통 과제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국어학자 김윤경은 해방 이후 우리말을 되살리는 데 힘썼다. 경향신문 1965년 12월 20일자

지금 통용되는 불고기란 표현은 구운(燒) 고기(肉)란 뜻인 야키니쿠의 번역어입니다.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 탓에 광복 전까지 한국 음식들은 일본어로 불리기 일쑤였습니다. 1950년대 들어 불고기가 제 이름을 찾긴 했지만 생선찜이나 된장찌개처럼 어순까지 우리 식(목적어+ 술어)으로 바로잡히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글학자 김윤경 같은 이는 “벤또 대신 도시락, 돈부리 대신 덮밥, 야키니쿠 대신 불고기란 말이 성공해 다행”이라고 안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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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구이(1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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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구이

조선인들은 이따금 소ㆍ돼지를 먹었고 그 내장도 먹었습니다. 고기는 양반, 곱창은 서민의 음식이었죠. 고기가 비싸니 고기 먹는 기분으로 곱창을 먹은 셈입니다. 돼지곱창은 내장의 잡내를 잡기 위해 양념을 발랐고 소곱창은 양념 없이 굽기도 했습니다. 곱창구이는 일본도 즐깁니다. 간장 양념을 발라 숯불에 구워 먹는 ‘호르몬야키(ホルモン燒き)’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버린 내장을 요리한 걸 시초로 봅니다.

해남 우시장 전경. 당시 이곳에선 한우 거래가 1년간 1만 3,000두에 달할 정도로 거래가 활발했다. 동아일보 1939년 5월 2일자

제국과 식민지의 우열은 선명했습니다. 일본에게 조선은 지배하고 계몽해야 할 대상이었지 호혜적 관계를 나눌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이 즐기던 호르몬야키 역시 미개함의 상징이었습니다. 1,000년 넘게 육식을 하지 않던 일본인들이 보기에, 가축 내장을 구워 먹는 모습은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호르몬야키라는 음식 이름에서도 멸시의 흔적이 보입니다. 호르몬(ホルモン)은 일본말로 ‘버리는 것’이란 뜻으로 비하 의도가 반영돼 있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에 남아 뿌리 내린 조선인들을 재일조선인(자이니치)이라 부른다. 사진은 2003년 일본 나고야의 한 음식점에 모인 재일조선인 2·3세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들은 살 궁리를 해야 했습니다. 패전 여파로 먹을거리가 부족해지자 일본인들도 내장구이에 관심을 보였죠. 이를 간파한 재일조선인들이 후미진 골목에 야키니쿠, 호르몬야키, 냉면 등을 파는 조선식 요리점을 차렸습니다. 고기를 주로 데쳐 먹던 일본인들에게 숯불 화로에 직접 구워 먹는 방식은 이색적이었습니다. 고기나 내장을 굽는 고소한 기름내가 일본 거리에 퍼지기 시작했고, 지금껏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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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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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일상으로 들어온 배추 김치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배추는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채소가 아니었습니다. 수확 시기가 겨울 초입에 한정돼왔기 때문입니다. 호배추(결구배추)를 재료로 한 지금 배추 김치의 모습이 갖춰진 건 일제 강점기입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배추에 비해 수확량이 많은 호배추 재배를 적극 권장했습니다. 감칠맛이 떨어지고 우거지가 적긴 했지만 값싸고 커 점차 김장용 배추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배추는 자취를 감췄죠.

조선시대에 먹던 배추. 위쪽은 모두 결구배추. 아래 왼쪽부터 화심배추, 경성배추, 개성배추, 반결구배추다. 주영하 '식탁위의 한국사'

채소 절임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음식입니다. 음식을 오래 저장할 방법을 궁리하다 찾아낸 방법이 염장(鹽藏)이죠. 개성이 강하긴 하지만 김치도 채소 절임의 한 종류입니다. 김치가 특별한 건 발효 식품이어서입니다. 동물성 단백질인 각종 젓갈이 고춧가루ㆍ마늘 같은 양념을 만나면 유산균 발효가 활발해집니다. 일본 기무치도 양념에 버무려 먹지만 숙성, 발효하는 과정은 없습니다. 조리법은 양국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걸로 추정됩니다.

식민지시대에 절인 배추와 양념으로 김장하는 여염집 풍경. 주영하 '식탁위의 한국사'

김치와 기무치를 둘러싼 논란은 소모적인 측면이 큽니다. 가령 단무지는 일본 다꾸앙을 우리 식으로 ‘왜곡’해 만든 음식이죠. 말린 무를 절여 쪼글쪼글하고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특징인 다꾸왕과 달리 단무지는 물기가 많아 팽팽하고 아삭아삭 씹힙니다. 물이 많아 말리지 않으면 절일 수 없는 일본 무와 달리 우리 무의 경우 물기가 적어 굳이 말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기무치는 거꾸로지만 어쨌든 일본에서 토착화한 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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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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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ㆍ맥주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술을 가정에서 빚었습니다. 집마다 술을 빚으니 도수와 맛도 달랐죠. 장맛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곡물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키면 막걸리고 여기에 용수를 박아 맑게 떠올리면 약주, 이를 소주고리에 넣고 불을 때 증류하면 소주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하자마자(1909년) 술에 세금을 매기고 제조 면허도 부여했습니다. 주세법을 제정한 거죠. 조선인들이 일본식 양조장에서 빚은 공장제 소주를 사 마시게 된 배경입니다.

일본식 청주인 ‘정종(마사무네)’ 광고. 정종은 술의 종류가 아닌 상호명이었으나 일본 술을 지칭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매일신보 1910년 12월 15일자

개화기 조선엔 다양한 술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엔 일본인들이 한국에 건너와 청주와 탁주를 만드는 공장을 세우고 맥주를 수입합니다. 서양 문물과 함께 와인ㆍ브랜디ㆍ위스키 등도 건너오지만 조선 민중이 즐기기는 어려웠죠. 일본이 들여온 맥주도 재조일본인을 위한 거였습니다. 맥주 산업은 1933년 동양맥주(오비맥주 전신)와 조선맥주(하이트진로 전신)가 제조 면허를 취득한 뒤 본격화했고 대중에게도 보급됐습니다.

개화기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은 양조장을 세웠는데, 양조장에선 일본식 간장도 생산됐다. 황성신문 1898년 11월 17일자

술엔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생활 양태가 녹아 있습니다. 조선 민중은 막걸리를 즐겼고, 막걸리는 농경 사회에 적합한 술이었습니다. 오이와 고추만 안주로 삼아도 궁합이 잘 맞았죠. 일제가 식민지에 퍼뜨린 소주는 도수가 35도에 이르는 독주였습니다. 고단하고 억울한 2등 신민의 삶을 독주로 달랜 셈입니다. 해방 뒤 소주는 점점 순해졌습니다. 소주 생산이 본격화한 1960년대에 30도로 낮아졌고 2000년대 이후엔 20도 미만 저도주가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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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하신 음식에 대한 결제가 가능합니다.
결제 버튼을 누르시면 한일 음식문화에 대한 황교익씨 인터뷰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알고 먹읍시다

올해는 광복 70돌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절연한 건 아닙니다. 대중 음식에도 인연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한일 양국 음식문화가 본격적으로 섞인 건 일제 강점기 때입니다.

하지만 쌍방 교류라 보긴 어렵단 게 음식비평가 황교익씨 시각입니다. 일방적 전파ㆍ수용 관계란 거죠. 실제 지금 우리 식(食)생활엔 일제 때 이식된 조리법이 상당합니다. 제국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죠. 맛에도 우열이 있단 관념이 팽배한 때였고 조선 백성은 제대로 조리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치욕을 딛고 새 식문화를 일구려면 직시해야 할 과거입니다.

황교익의 생각

배다른민족 늬들이 한식을알아?

만든 사람들

기획 :

한국일보
디지털뉴스부 인터액티브팀

글 :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사진 :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디자인 :

한규민
szeehgm@hankookilbo.com

백종호
jongho@hankookilbo.com

프로그래밍 :

김태식
ddasik99@hankookilbo.com

퍼블리싱 :

이태수
dlxotniocu@naver.com

동영상 :

박리세윤 인턴 PD

자료 조사 :

곽범신 인턴 기자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