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설계한 완벽한 '고문밀실' 남영동 대공분실

- 서울 도심 한복판의 ‘아우슈비츠’ -

서울역과 용산역을 잇는 남영동 1호선 전철 플랫폼에 서면,
철길 너머로 짙은 회색의 벽돌 건물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완벽한 ‘고문밀실’이라 불렸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1976년 유신정권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만들어진 이곳은
취조와 고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됐다.
1987년 1월, 이곳에서 모질게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 박종철의 죽음은
그해 6월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 항쟁의 신호탄이 됐다.

그보다 앞서 십 여 년간 수없이 많은 ‘박종철들’의 비명이 이곳에 소리 없이 쌓였다.
평범한 시민들은 난데 없이 끌려와 간첩으로 몰렸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빨갱이로 낙인 찍혔다.

공식기록을 통해 알려진 피해자만 약 400여명.
그 중 일부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명칭부터 운영방식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불과 7미터 가량 떨어진 남영역의 철길 위로 수많은 기차들이 지나쳤겠지만,
시민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가 이곳에서 짐승처럼 다뤄지며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찻소리 아래 사라졌던 그 비명 소리를 따라
40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로 함께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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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전경

이곳으로 끌려온 피해자들은 자택, 학교, 선배의 자취방, 동네 골목길 등 가장 익숙했던 장소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됐다.

오직 1명을 체포하기 위해 사복경찰 4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표적이 철저히 ‘홀로’ 되는 순간을 노렸다. 그래서 누구도 피해자들이 짐승처럼 연행되어 가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검은 천이 눈부터 가리지. 고개를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어요. 잠깐이라도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양쪽의 수사관들이 뒤통수를 세게 눌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도록 말이야.”고문피해자 유동우

내리 달리던 차가 멈추면,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지척에서 탱크가 밀려오는 듯한 위협적인 철문 소리. 한번 이 철문 안에 갇힌 자들은 절대로 성한 몸과 정신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갈린, 일상과 지옥. 피해자들은 이곳을 ‘섬’이라 일컬었다.

건물 전경
이곳으로 끌려온 피해자들은 자택, 학교, 선배의 자취방, 동네 골목길 등 가장 익숙했던 장소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됐다.

뒷문과 나선형 계단

피해자들은 건물의 정문이 아닌 뒷편의 작은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선다. 1층 출입문을 통과해 5층 조사실에 이를 때까지, 눈을 가린 안대는 단 한 시도 벗을 수 없다.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서면, 작은 호송용 승강기와 몇층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나선형 철제계단이 등장한다.

이 나선형 철제계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심리적 고문 도구였다. 5층 조사실에서 심문을 하다가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면, 수사관들은 “이 새끼 안되겠다, 지하실로 가자”며 눈을 가리고 팔을 결박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 지하실은 없었더라고요. 당시엔 몰랐죠. 밑도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무서웠고…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다 말하겠다’며 올라왔죠.”고문피해자 황인욱

이미 긴 시간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반복해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겐 더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지하실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뒷문과 나선형 계단
피해자들은 건물의 정문이 아닌 뒷편의 작은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선다. 1층 출입문을 통과해 5층 조사실에 이를 때까지, 눈을 가린 안대는 단 한 시도 벗을 수 없다.

뒷문과 나선형 계단

피해자들은 건물의 정문이 아닌 뒷편의 작은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선다. 1층 출입문을 통과해 5층 조사실에 이를 때까지, 눈을 가린 안대는 단 한 시도 벗을 수 없다.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서면, 작은 호송용 승강기와 몇층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나선형 철제계단이 등장한다.

이 나선형 철제계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심리적 고문 도구였다. 5층 조사실에서 심문을 하다가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면, 수사관들은 “이 새끼 안되겠다, 지하실로 가자”며 눈을 가리고 팔을 결박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 지하실은 없었더라고요. 당시엔 몰랐죠. 밑도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무서웠고…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다 말하겠다’며 올라왔죠.”고문피해자 황인욱

이미 긴 시간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반복해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겐 더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지하실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뒷문과 나선형 계단
피해자들은 건물의 정문이 아닌 뒷편의 작은 쪽문을 통해 건물로 들어선다. 1층 출입문을 통과해 5층 조사실에 이를 때까지, 눈을 가린 안대는 단 한 시도 벗을 수 없다.

5층 조사실 복도

나선 철제 계단, 엘리베이터를 통해 5층에 도착하면 양 옆으로 16개의 조사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음침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 5층은 ‘고문과 취조’에 최적화된 구조를 자랑하는 공간이다. 거장의 천재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마치 이곳이 ‘지하실’ 같았다고 기억한다. 복도 양쪽 끝에 창살로 막힌 작은 창문이 있지만,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복도의 천장 등은 대개 꺼져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90년대 이후 경찰청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201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되기 전까지 약 20여년간 경찰들의 체력단련 시설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5층도 리모델링을 거쳤다. 현재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5층의 모습은 70~80년대 원형의 모습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당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흔적 정도만이 남아있다.

5층 조사실 복도
나선 철제 계단, 엘리베이터를 통해 5층에 도착하면 양 옆으로 16개의 조사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음침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 5층은 ‘고문과 취조’에 최적화된 구조를 자랑하는 공간이다. 거장의 천재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509호 박종철 조사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던 5층의 9호실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당시의 욕조와 변기, 침대 및 철제 책상 등의 가구들을 최대한 당시와 같은 원형으로 보존했다.

중앙 세면대 위로 박종철의 앳된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의 그의 얼굴은 영원히 스물 한살이다.

사건 당시 박종철은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다. 1987년 1월 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불시에 연행됐다.

그는 함께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캐묻는 수사관들의 추궁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차별적인 구타와 폭언, 전기고문, 물고문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는 바로 이 방에서 하루 만에 사망했다.

509호 박종철 조사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던 5층의 9호실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당시의 욕조와 변기, 침대 및 철제 책상 등의 가구들을 최대한 당시와 같은 원형으로 보존했다.

칠성판이 있던 조사실

현재 조사실 내부의 벽면과 천정은 밝은 초록색이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사실마다 벽면과 타일의 색이 달랐다고 한다.

특히 일부 조사실은 짙은 붉은 색을 띄었는데, 누란 빛깔의 백열등 불빛을 받아 천지사방이 ‘핏빛’으로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이 붉은 방에 갇혔던 피해자들은 특히 더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칠성판이 있던 조사실
현재 조사실 내부의 벽면과 천정은 밝은 초록색이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사실마다 벽면과 타일의 색이 달랐다고 한다.

대공분실 옆 기찻길

어디로 끌려왔는지조차 몰랐던 피해자들은 살짝 열린 창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를 들은 후에야 어렴풋이 장소를 인지했다.

대공분실과 남영역은 담벼락 하나를 두고 붙어있었기 때문에 역을 통과하는 기차 소리와 플랫폼을 바삐 오가는 승객들의 웅성거리는 소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대공분실 옆 기찻길
어디로 끌려왔는지조차 몰랐던 피해자들은 살짝 열린 창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를 들은 후에야 어렴풋이 장소를 인지했다.

고문 경찰들의 쉼터

고문 수사관들이 식사를 하던 식당 별관은 남영동 대공분실 본관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폭이 좁고 긴 5층 조사실의 창문들이 훤히 보이는 이 테라스에 앉아, 그들은 여유롭게 후식 커피를 마셨다.

죄 없는 사람들이 짐승처럼, 벌레처럼 다뤄지는 풍경 앞에서 이들은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안부를 물었으며, 동료들과 담뱃불을 나눠 붙였다. ‘더 효과적으로 패려면,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 해’라며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았다.

악의 평범성

피해자들은 그들을 ‘악마’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한 악은 ‘국가주의’라는 신념 아래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고문 경찰들의 쉼터
고문 수사관들이 식사를 하던 식당 별관은 남영동 대공분실 본관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폭이 좁고 긴 5층 조사실의 창문들이 훤히 보이는 이 테라스에 앉아, 그들은 여유롭게 후식 커피를 마셨다.

외벽의 창문 크기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물 외벽을 살펴보면, 다른 층 창문들에 비해 유독 좁고 긴 3층과 5층의 창문들이 눈에 띈다. 3층과 5층은 조사실이 있던 공간이다. 고작 한 뼘 너비, 어린 아이의 머리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창이다.

고문 수사를 받다가 앞날을 비관한 조사 대상자가 행여라도 몸을 던질까봐, 투신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너비를 좁게 만든 것이다. 탈출 시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비명조차 새어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외부에서도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맞은 편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조차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탱크 소리의 공포, 철문

남영동 대공분실은 국책연구기관으로 위장됐다. 굳게 닫힌 철문 바깥쪽엔 ‘국제해양연구소’라 적힌 간판이 내걸렸다.

시커멓고 육중한 철문은 평소엔 굳게 닫혀 있다가, 누군가 연행되어 들어올 때에만 잠깐씩 열렸다. 바닥에 깔린 레일을 타고 철문이 ‘드르르륵’ 열리던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컸다고 한다.

호송용 승강기

1층과 5층을 바로 잇는 이 승강기는 가로 1.6m 세로 1.8미터 크기로 성인 남성 2명이 타면 꽉 찰 정도로 협소했다. 조사대상자는 건장한 체격의 수사관 3~4명에 의해 완벽하게 포위 당한 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나선형 계단

나선형 철제계단은 약 75~80도의 경사를 자랑한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구조다. 나선의 반경이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철제계단은 1층에서 5층까지 바로 이어진다.

“고개를 숙이고 총을 허리에 댄 채, 이 나선형 철제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쏟아져요. 사람을 그야말로 얼어붙게 만들더라고.”고문피해자 이선근씨

끊임없이 빙글빙글 이어지는 원형계단을 오르다 보면, 방향감각과 위치감각이 동시에 무뎌진다. 일반적으로 원형계단은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제대로 된 계단을 설치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사용하곤 하지만, 이곳에선 철저히 심리적 공포를 조작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됐다.

지그재그로 설계된 방

조사실의 문들은 서로 엇갈려 배치돼 있다. 마주보고 있는 조사실의 문이 동시에 열려도 맞은편 조사실에 갇혀 있는 이를 바로 볼 수 없도록 설계한 것이다. 문이 열려도 오로지 벽뿐이니, 갇혀 있는 자는 완벽한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똑같이 생긴 문의 모양

문의 모양은 어디를 보나 하나같이 똑같다. 조사실 문이나,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문이나 모두 같은 모양이다. 매일같이 이곳을 드나들었던 수사관들조차 헷갈려 했을 정도다. 혹시라도 조사를 받던 피해자가 방을 탈출해도 어떤 문이 출구로 이어지는 문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욕조

처음 조사실에 들어선 피해자들은 욕조를 보고 의아해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화장실에 욕조가 갖춰져 있지 않은 가정집이 대다수였다. 구치소나 감옥과 같은 수용시설은 물론이고, 보안사나 안기부와 같은 다른 수사기관에서도 ‘욕조가 있다’는 전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처음에 욕조를 봤을 땐, ‘저기서 목욕이라도 하라는 건가’ 싶었지. 거기에 고개를 쳐 박히고 나서야 그게 물고문 도구였다는 걸 알았지요.”고문피해자 최연석

이곳에서는 욕조에 피해자를 거꾸로 박거나, 수도꼭지를 피해자의 코에 갖다 대고 트는 등의 물고문이 이뤄졌다. 고문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 또한 이 욕조가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물고문을 위한 것이었음을 시인했다.

좁은 창문

창문이라기 보단 ‘환기창’에 가깝다. 폭은 한 뼘 정도이며 위아래로 긴 형태를 띤다. 고문이 시작될 때는 커튼을 쳐서 외부의 빛을 철저히 차단했다.

이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두꺼운 철문 너머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고 한다. 손에 닿을 듯 가까웠지만, 도저히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린 일상이었다.

피해자들은 이따금씩 들려오는 기찻소리,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안온한 바깥세상의 일상과 철저히 대비되는 자신의 처지에 극심한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변기와 세면대

창문 아래로는 세면대와 변기가 출입문 쪽을 향한 채 배열돼 있다. 교정시설 내 독방 감옥과 비슷한 구조다. 허리 보다 낮은 높이의 칸막이가 있지만, 출입문 상단에 위치한 모니터링 카메라를 피할 수는 없다.

용변을 볼 때나, 몸을 씻을 때나 끊임없이 감시 당한다.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구조다.

조사실 책상

수사관과 피해자들이 마주 앉아 조서와 자술서를 써내려 가던 철제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고정돼 있다. 행여라도 조사대상자가 가구를 움직여 자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피해자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을 때엔 언제나 이 책상 앞에 앉아야만 했는데, 마주 앉은 수사관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수시로 구타를 당했다. 수사관은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손을 뻗어 가슴과 얼굴을 가격했다.

침대와 모포

조사실 내에 있는 침대는 ‘잠을 재우기 위한’ 용도가 전혀 아니었다. 일종의 ‘정신적 고문 장치’였다. 조사실에 한번 들어간 피해자는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내리 진술서를 써내야만 했다.

2~3일간 잠을 전혀 자지 못한 상태에서 눈 앞에 침대가 보이면 피해자들은 무너져 내렸다.

칠성판

칠성판은 본래 시신을 눕히기 위해 관에 까는 널빤지를 뜻한다.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사람의 사지를 묶어 결박하고 고문을 가하기 위한’ 고문 도구로 사용됐다.

칠성판은 성인 남성의 키보다 큰 크기의 널빤지로, 좌우에 달린 7개의 가죽끈이 고문대 위의 사람을 완벽하게 결박했다. 피해자들은 이렇게 사지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고정된 상태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조광기

조사실 내 천장에는 3개짜리 백색 형광등과 조도를 조절할 수 있는 원형 백열등이 설치돼 있는데, 이 모든 천장등은 조사대상자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철망으로 막아두었다.

문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조광기를 통해 수사관들은 방 내부의 조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때로는 종일 깜깜했고, 또 때로는 종일 밝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조사실 내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투시경

보통 투시경은 문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된다. 이곳에선 반대였다. 조사실 바깥에 있는 수사관들이 조사실 내에 갇혀 있는 조사대상자들의 상태를 감시 하기 위해 문 바깥 쪽에서 안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수사관들은 여성 고문피해자들이 몸을 씻거나 용변을 볼 때마다 도어 뷰어를 들여다보며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

방음벽

현재는 원형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조사실 내부엔 비명이나 신음을 흡수할 수 있도록 방음재가 설치돼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일부러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하는 ‘목재 타공판’을 썼다는 것이다. 목재 타공판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새어나간 비명소리는 낮고 음산한 소음이 되어 반대편 벽면으로 전달되곤 했다.

복도끝 창문

5층에서 내려다 본 남영역 플랫폼

"계단 밟는 소리가 귀신 울음소리처럼 울려 펴져"

“머리카락이 욕조에 둥둥”

“바깥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

“물고문 당하고 나니 한여름에도 덜덜 몸이 떨렸어”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잘 안갔어”

“누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어떤지 찝찝했지”

“나중에 여길 지나가다가, 여기가 내가 고문당한 그곳이구나 알았지”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공식기록을 통해 알려진 피해자만 약 400여명

그리고 가해자들대부분 집행유예, 조기 가석방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협조로 서울 용산구 남영동의 대공분실 건물 내부 곳곳을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