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정국이 요동친다. 계엄사령부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애썼을 뿐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만찬 상황과 대통령을 쏜 중정부장 김재규의 주장은 일절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대통령이 시해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무슨 영문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1979년, 서울에서 울린 두 번의 총성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한 발은 궁정동에서, 다른 한 발은 한남동에서.
첫 번째 총알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격발했다. ‘10·26 사건’이다.
대통령이 시해당하자 군부는 이튿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부 산하에 ‘언론 검열단’을 만든다.
기자들이 취재한 불편한 진실을 검열해 삭제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또 한 발. 12월 12일 밤, 전두환의 신군부가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납치할 때 쏜 것이다.
이후 신군부가 권력을 접수했고 언론은 암전됐다.
40여 년이 지난 2025년. 한국일보는 당시 삭제됐던 본보 기사 원고 352건(요약 문건 포함)을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부터 입수해 되살려냈다.
1979년, 서울에서 울린 두 번의 총성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첫 번째 총알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격발했다. ‘10·26 사건’이다.
또 다른 한 발은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납치할 때 쐈다.
당시 비상계엄 하에서 군부는 ‘언론 검열단’을 만든다. 기자들이 취재한 불편한 진실을 검열해 삭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탓에 언론은 암전됐다.
본보는 당시 삭제됐던 기사 352건(요약 문건 포함)을 40여 년 만에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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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수사를 지휘한다. 그는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허욕이 빚은 내란 목적 살인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전두환은 10·26사건 수사를 계기로 군권을 장악해간다.
한국일보는 1980년 1월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내보내려 했다. 기사 초안에는 김재규의 발언 중 “유신 7년 동안 체제에 항거하는 국민의 생각이 누적되다 부마사태가 일어났고 이는 삽시에 다른 대도시로 확산될 판이었다” “(부산의 상황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박 대통령이 ‘앞으로 서울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다)” 등의 발언이 담겼다. 검열 세력은 이를 삭제했다. ‘대역죄인을 옹호하고 전임 대통령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를 들었다. 다음은 당시 지워졌던 주요 기사다.

박흥주
10·26사건에 가담한 박흥주의 초등학생 딸이 쓴 '구명 편지'를 보도한 기사도 삭제됐다. 박흥주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으로 재판 과정에서 상관인 김재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사형을 선고 받고 1980년 3월 집행돼 사망한다.

김재규 진술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법정 진술을 담은 기사도 군부에 의해 삭제됐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채의석은 "(유신체제의 종지부를 찍은) 김재규를 의사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항간의 동정이 쏠리자 신군부는 이를 불안 요소로 간주했다"며 "박정희의 장학생이었던 신군부는 그의 위상을 손상시킬 일체의 격하 움직임을 극렬 저지했다"고 회고했다.
박선호 진술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10·26사건에 가담했다. 김재규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드러냈으며 사형이 선고돼 1980년 5월 집행돼 사망한다.
10·26사건 이후 국내 정치 권력은 진공 상태에 놓인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마흔여덟의 ‘투스타’(준장)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권력을 향한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에게 누명을 씌워 납치하기에 이른다.
육사 출신 사조직인 하나회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이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반란 당일인 12일 저녁, 여러 경로로 ‘군 내부 동향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불길한 '촉’을 곤두세웠다. 오후 7시 20분, 대여섯 발의 권총 격발음이 들렸다. 전두환 세력이 정승화를 납치하던 때 반란군 측이 공관 병력에 총을 쏜 것이다. 한국일보 사건팀 기자 10여명은 사건 현장으로 뛰어갔다. 반란군과 경비 세력 간 총격전, 시내로 진격한 탱크, 불안한 시민들의 표정 등을 꼼꼼히 취재했다.
취재한 내용은 200자 원고지 14매 분량의 기사(총 4편)에 담겼다. 하지만 신군부는 밤 사이 검열을 통해 이를 전면 삭제했다. 이유는 ‘국민 여론을 자극하고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등장 때부터, 정통성 없는 권력을 잡기 위해 언론 검열을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다음은 당시 삭제 기사다.

수경사 헌병대 소속 장갑차로 추정된다. 전두환의 계략으로 연희동의 요정에 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정승화가 납치당한 사실을 알고 전화로 병력 출동을 지시한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경비병과 총격전을 벌인 병력은 전두환이 이끄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합동수사본부 소속 헌병들이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분대 규모(8~15명)가 아닌 60명에 달했다.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러 온 허삼수·우경윤 대령을 따라 신분을 숨기고 공관에 진입했다.
이재천 소령은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라”는 정승화의 명령에 따라 수화기를 집어 들다가 보안사 수사관이 쏜 총에 맞았다. 전두환의 부하였던 허삼수가 정승화 연행을 시도하며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허위 주장을 하자 이를 직접 확인해 보려던 차였다.

신군부가 퍼뜨린 대표적 거짓말이다. 전두환은 12일 오후 6시 30분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접견하고 “정승화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에 깊이 연루된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며 체포 재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최 대통령은 “국방 장관을 통해 정식 보고하라”며 버티다 다음 날 새벽 사후 재가한다. 이는 훗날 신군부가 저지른 내란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신군부는 전두환이 미국에 12.12에 대해 설명했다는 사실을 담은 기사도 삭제했다. 그들은 '12.12 사태'를 '12.12사건'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채의석 기자는 "사안이 별 것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1978~1981년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외교관.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돈 오버도퍼에 따르면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에 대해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절대 신뢰할 수 없고, 양심도 없고, 잔인한 데다,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김대중의 이름을 신문에 쓰지 마라.’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전두환 세력은 야권과 재야 정치 지도자가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는 걸 경계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표적이다. 전두환은 이들을 자신의 집권 시나리오를 방해할 가장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특히 김대중은 존재 자체를 도려내려 했다. 그의 이름조차 쓸 수 없도록 한 신군부 압력 탓에 기자들은 김대중을 ‘재야의 모 인사’라고 뱅뱅 돌려 적었지만 이마저도 삭제됐다. 김영삼을 다룬 기사도 가위질을 당했다. "야당 총재(김영삼) 투쟁 이야기는 전혀 쓰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서울의 봄’을 맞아 봇물 터지듯 나오던 개헌 논의도 검열에 막혀 보도되지 못했다.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갔지만 권력 찬탈 야욕이 있던 전두환의 신군부는 이런 논의가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걸 꺼렸다. 다음은 주요 삭제 기사다.

유신 독재가 끝난 뒤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개헌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야당과 재야 그룹뿐 아니라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개헌 논의에 참여했다. 하지만 군부는 개헌 관련 기사들도 다수 삭제 조치한다.

지평선은 한국일보 기자들이 쓰는 칼럼 코너다. 10·26사건과 12·12군사반란 이후 군부는 국가 안보 저해를 이유로 이와 무관한 기사마저도 검열, 삭제조치했다. 이 같은 행태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자 이마저도 삭제조치 했다.

김영삼 총재
신민당 총재이자 국회의원이었던 김영삼은 1979년 9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 행정부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화를 하도록 압력을 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김영삼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안이 당시 여당 주도로 상정돼 제명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김영삼의 정치적 거점인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부마민주항쟁’이 벌어진 데 이어 10·26사건이 발생해 대통령 박정희가 시해당한다.
1969년 6월 20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국회의원 김영삼을 암살하려고 괴한들이 그의 승용차에 질산병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을 잡지 못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 박정희의 3선 개헌 움직임에 반대하고 있었다.

여기서 ‘재야의 모인사’는 정치인 김대중을 뜻한다. 신군부가 신문에서 그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못하게 하자 기자들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름 대신 ‘재야의 모인사’라는 표현을 생각해냈다.

김대중
신군부는 정치인 중에서도 김대중은 존재 자체를 도려내려 했다.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신군부는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라고 여긴 데다 과거 박정희와 대선에서 붙어 박빙 승부를 벌였던 기억이 있기에 국민의 머릿속에 이름조차 지워버리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두환
전두환은 육사 출신 사조직인 ‘하나회’와 함께 12·12군사반란에 이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5·17내란 등을 통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다. 이후 전두환은 ‘그림자 정부’ 역할을 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회의 상임위원장을 맡는다.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검열단은 이를 삭제 조치한다. 권력 찬탈 의지가 우리 국민과 미국 등에 일찍 알려지면 집권에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두환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80년 8월27일 '체육관 선거'에서 99.4%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된다.

일반 국민에게 물어본 이 설문조사 결과를 다룬 기사도 삭제됐다. 전두환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 등을 이유로 들며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등 명분 삼았다. 그런데 국민들이 남침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보는 응답 결과가 나오자 이를 불편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1979년 말, 서울시청 2층 강당에는 거대한 ‘검열 공장’이 꾸려진다. 계엄사 산하의 언론검열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매일 젊은 기자들이 기사 초판을 가지고 와 또래로 보이는 군 초급 장교들에게 검열 받아야 했다. 12·12군사반란으로 권력을 빼앗은 신군부는 검열을 한층 노골화했다. 전두환 세력이 보기에 ‘불편한 역사’는 매일 아주 쉽게 지워졌다.
언론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바라는 시위 열기가 달아오르자 젊은 기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하루 일과를 마친 후 회사 강당과 복도에 모여 “계엄 철폐” “진실 보도”를 외쳤다.
하지만 기자들의 저항 역시 기록에서 지워졌다. 신군부는 계엄에 비판적인 언론계 인사를 잡아 들이고 해직시켰다. 그해 연말까지 1,000명 넘는 언론인이 강제해직됐고, 11월엔 전국 언론사 64곳을 18개로 강제통폐합하며 ‘언론 탄압’의 정점을 찍는다. 이 모든 건 전두환을 ‘왕’(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이었다. 다음은 주요 삭제 기사다.

신군부가 1979년 10·26사건과 12·12 군사반란을 계기로 언론검열을 강화하며 보도를 옥죄자 기자들도 1980년 5월 ‘반격’을 벌인다. 5월 12일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스 등 자매지 기자들은 총회를 열고 보도 검열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낸다.
이후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며 벌어진 참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게 하자 젊은 기자들의 분노는 더 커진다. 하지만 농성은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5월 27일 막을 내렸다.

신군부는 언론검열 반대 투쟁 일선에 섰던 기자협회 간부들을 불법체포하고 고문했다. 당시 기자협회 부회장이었던 노향기는 “고문기술자가 미안해 할 정도의 잔혹한 고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해 연말까지 최소 1,000명이 넘는 언론인이 강제해직됐고, 11월에는 전국 64개 언론사가 18개로 강제통폐합되는 데 이른다.
유신 체제 붕괴 후 첫 봄이던 1980년 3월, 개학과 함께 대학가에는 민주화 열망이 부풀어 올랐다. 4월부터는 신군부가 정권 장악 음모를 노골화하면서 시위의 열기도 고조됐다.
서울역 일대에 대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인 5·15 서울역 시위는 그 열망이 최고조로 분출한 사건이었다. 5월 중순이 되자 캠퍼스에 머무르던 학생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가두시위를 시작했고, 13~15일 사흘 연속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가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소식은 신문에 실리지 못한다.
압박감을 느낀 신군부는 이틀 뒤인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내란을 벌였다. 이어 무장한 계엄군을 동원해 대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기자를 불법체포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동시에 군부는 학생들의 집회·시위를 억누르기 위해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정치 집회 역시 금지했다. 학생 시위를 소개한 기사도 삭제 대상이었다.

신군부는 시위 학생들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기사만 신문에 실을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언론사에 하달한 검열 지침을 통해 학생들이 데모 후 휴지·돌멩이를 청소하는 모습 등은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학생들과 경찰관이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다는 내용의 이 기사도 그런 맥락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병영집체훈련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뒤 대학가에서는 병영집체훈련 폐지 요구가 들불처럼 번진다. 병영집체훈련은 대학 1~3학년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서 1년에 열흘간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다. 신군부는 이 문제에 예민하게 대응하며 관련 요구를 담은 기사를 모조리 삭제시켰다.

1980년 5월에는 '서울의 봄'(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민주화 열망이 분출되던 시기)이 절정에 달했다. 14일에는 서울에서만 21개 대학 7만여명이 모였고 15일엔 서울역 주변에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운집해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다. 이 기사는 그런 상황에서 긴장한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담았는데 삭제 조치됐다.
시위 열기에 압박감을 느낀 신군부는 이틀 뒤인 17일 비상계엄을 전국 확대한다. 이는 내란 행위였다.
아, 광주. 1980년 5월, 이 도시에는 신군부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다. 전두환 세력은 특수부대를 투입해 성난 시민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한국일보는 상황이 심각해지자 광주로 기자들을 급파한다. 김해운 사진부 기자를 시작으로, 19일엔 조성호·유동성 사회부 기자가, 21일 사회부 채의석, 사진부 김용일·박태홍 기자 등이 추가 투입됐다. 이들은 호남 주재 기자들과 함께 도심 곳곳을 돌며 상황을 세세히 기록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절규를 담은 기사들도 검열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현장 취재 기자들은 좌절했다. 신문에는 광주의 시민들의 항거를 ‘소요 사태’라고 규정한 군부 측 주장이 실렸다. 기자들은 당시 취재했던 기록을 어떻게든 역사에 남기려 신문 대신 사보에 광주 취재기를 실었지만 이마저도 검열단에 의해 삭제 당한다.

광주 시민 돕기 운동
계엄군 총칼에 전쟁통과 다름없이 초토화된 광주는 당장 생필품난, 식량난에 허덕였다. 광주 현장 취재를 다녀온 유동성 기자는 5월 28일자 신문에 “광주 시급한 생필품 공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비상약이 동난 약국과 생필품이 다 털린 동네 슈퍼 광경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소식이 전해진 전국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최종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이 시행됐다. 고작 157명의 광주 시민군을 제압하겠단 명목으로 장교 276명과 사병 5,800여 명이 투입된 끝에 다수의 시민 사상자가 발생했다.
1979년과 1980년 한국 경제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제2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 터진 탓에 유가가 급등한 데다 냉해까지 겹쳐 농사도 망쳤다. 달러가 바닥나면서 수입품 가격부터 오르며 물가가 뛰었다. 가뜩이나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임금을 떼이다 못해 부당 해고까지 당한다.
하지만 군부는 ‘사회혼란 조성’ ‘근로자 선동 및 자극 우려’ 등을 이유로 들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신문에서 지워버렸다. 전국 탄광에서 광부들은 임금 체불, 집단 해고에 항의했지만, 이를 다룬 기사는 나가지 못했다. 이런 억압 속에 터진 것이 1980년 4월 ‘사북 사건’이었다.
강원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노조 지부장 사퇴와 처우 개선을 요구했는데 신군부는 오히려 이들을 잡아 들여 고문했다. 권력을 잡은 이들은 전국 곳곳에서 터져나온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을 담은 기사를 모조리 지웠다.

’서민층과 근로자를 선동할 우려가 있다’며 신군부가 삭제시킨 기사다. 기사가 작성된 1980년 1월 31일 이후, 수출자유지역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는 시도는 계속됐지만 빛을 보진 못했다. 같은 해 3월엔 수산물냉동업체 한국북능 등 4개 회사에서 노조가 최초 결성됐지만 이후 신군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3개월 만에 ‘자진 해산’ 형식으로 사라졌다. 억눌렸던 노동자들은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노조를 조직하며 노동운동에 나섰는데, 민주화 이후에도 외국 자본의 철수를 통한 해고 문제는 계속됐다.

1980년 당시 한국 경제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였던 김영호는 “국제 경기 침체 속에서 한국에서 저임금을 따먹고 살던 제조업체들은 더 임금이 낮은 국가로 옮겨가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휴·폐업하는 업체들이 속출했는데 신군부는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국가의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동원탄광속보
사북사건을 다룬 기사로 언론검열단에 의해 삭제당했다. 강원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어용 노조 지부장 사퇴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회사와 경찰과 충돌했다. 당시 신군부는 실제 계엄군 투입을 준비시켰다. 기사에는 광부들이 국민학교 학생을 앞세워 저항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이원갑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은 “그런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며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1980년 9월, 한국일보 신참 기자 유동성은 전남 신안군청 행정계 사무실에서 ‘동향보고’라고 적힌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신안’ ‘안좌면’ ‘괴질’ ‘3명 사망’ 같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면사무소에 확인을 해보니 “괴질로 3명이 숨졌다”고 답했다. 이 과정을 거쳐 9월 11일자 한국일보 6면에는 호남을 할퀸 콜레라의 진상이 처음 보도됐다.
하지만 신군부에게 콜레라의 확산은 숨기고 싶은 소식이었다. 방역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담긴 기사를 삭제시켜 버렸다. 전염병 예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보의 빠른 공유가 중요했지만 전두환 세력에겐 국민의 생명보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다.
사라진 건 전염병을 다룬 기사뿐이 아니었다. 원양어선 선원들이 이역만리 사모아에서 사망한 사건, 탈영병이 던진 수류탄으로 민간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 등이 보도되지 못했다. 정보 차단에 따른 피해를 오롯이 그 시대 국민들이 입어야 했다.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에 따르면 신군부는 특히 군 관련 사고를 다룬 기사에는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삭제시켰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군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여름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콜레라가 유행한다. 전염병을 예방하려면 국민들에게 적시에 정보를 제공해야 하지만 신군부는 콜레라 관련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걸 탐탁지 않아했다. 한국일보 기자 유동성이 쓴 이 기사에서는 콜레라 발생 후 우물 소독이 늦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언론검열단은 이를 삭제해버린다.

1980년 10월, 미국령 사모아에 영풍원양 소속 선원 156명의 발이 묶인다. 선원 강사랑씨가 현지인들에게 물건을 뺏기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현지인과 한국인 선원들이 대규모 충돌해 이화영, 박성득씨가 추가로 숨졌다. 유족들은 회사의 잘못을 질타하며 정부가 나서 해결해줄 것을 바랐다. 하지만 신군부는 오히려 이 소식을 전한 기사마저 보도하지 못하게 막는다.
보도검열단의 가위질은 집요했다. 기사뿐 아니라 시대 상황을 우회적으로 꼬집는 만평도 단골 검열 대상이었다. 반골 기질에, 고집스러운 성격이었던 화백 안의섭이 한국일보에 그린 4컷 만평 ‘두꺼비’ 역시 신군부에겐 눈엣가시였다.
두꺼비에 등장한 주인공은 “될 수 있으면 계엄을 빨리 해제하려고 한다”는 최규하 대통령의 발언에 환호한다. 또 지명수배자 명단을 보던 주인공이 ‘현 정부는 전지전능한 줄 알았다’며 비꼬기도 한다. 물론 이 만평들 모두 삭제 조치됐고, 그 자리는 다른 기사나 광고로 급히 메워졌다.
꼿꼿했던 안 화백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년 대통령을 풍자하는 만평을 그렸다가 예순 넘는 나이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두꺼비는 1987년 8월까지 1년 7개월간 연재 중단되기도 했다.

주인공이 '광주 사태 170명 사망'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 기사를 읽고 돌처럼 굳은 모습을 그렸다. 안의섭은 검열로 자신의 만평이 삭제된 다음날에는 주인공이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내용을 곧잘 그렸다고 한다.

안의섭은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는 신문사가 속출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신군부에겐 국제적 이미지 조성이 중요했다. 독재가 아닌 정통성 있는 정권으로 인식되려고 애썼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 받는 데 혈안이었다.
이 때문에 신군부는 외교 문제를 상세히 취재해 쓴 기사도 신문에 싣지 못하게 했다. 예컨대 5·18 민주화운동의 폭압적 진압 등을 지켜보던 아프라카의 세이셸 공화국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단교 선언을 하자 이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못하도록 했다.
북한과는 적대적 공생 관계였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당시 그 명분으로 "사회 혼란에 따른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신군부는 언론이 북한 관련 뉴스를 싣지 못하도록 삭제 조치하기도 했다.

중국 기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담은 기사인데 신군부는 이를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중공이 북한을 무력으로 도울 여유가 없다”는 등 북한의 대남 도발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 부분을 거슬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이쉘즈’는 세이셸 공화국의 오기로 추정된다. 아프리카의 섬나라인 세이셸은 전두환 신군부의 5.17 내란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을 지켜보다가 한국과 단교한다. 이후 1995년 관계를 복원했다. 전두환 세력은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뉴스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정통성 없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는 미국으로부터 인정 받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 기사에는 한국 정치 상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미 국무성 관료와 하원 의원 등의 시선이 담겼다. 신군부로서는 미국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기에 이 기사를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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