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밑의 공포는
현재 진행 중

‘싱크홀(Sink hole)’은 석회암 또는 화산토 지반이 지하수에 의해 녹거나 침식되면서 그 위의 표층이 꺼지는 자연 현상을 뜻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같은 자연적 싱크홀이 드물다. 대신 지하에 매설된 기반 시설의 손상과 굴착 공사로 인해 도로가 함몰되는 사고가 빈번하다. 이를 자연 현상과 구별하기 위해 관리 주체에 따라 ‘지반침하’ 또는 ‘도로함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박창근 가톨릭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보이지 않는 지하 시설물 정비는 예산 집행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어 도시 기반 시설 노후화로 인한 싱크홀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지난달 강원 강릉을 비롯해 이달 들어 충북 청주와 광주, 부산에서 멀쩡하던 도로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발밑의 공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도심에 싱크홀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심 싱크홀은
자연 재해 아닌 인재다.

일반적으로 도시 개발과 함께 지하에 매설된 상ㆍ하수관과 가스관, 전기ㆍ 통신구 등 기반 시설이 내구연한을 넘기면 차츰 손상 부위가 늘어나고 토사 유실이 진행된다. 여기에 지하철이나 빌딩 신축을 위한 굴착공사가 빈번해지면서 싱크홀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인구밀도가 높고 각종 지하 기반 시설이 집중된 서울은 타 지역에 비해 싱크홀 사고가 빈번하고 시민들이 사고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

도심 싱크홀 발생 주요 원인

도심 싱크홀이 발생하는 주된 원인은 노후 하수관이다. 서울 시내 도심 싱크홀 사고의 원인을 분석해보니 전체 359건 중 240건(67%)이 하수관과 관련이 있었고, 굴착공사가 75건(20.9%), 상수관이 26건(7.3%)으로 그 뒤를 이었다. 하수관이 원인이 된 사고만 따져 보면 관로 자체의 노후로 인한 사고가 98건(40.8%), 접합부 결함이 111건(46.3%)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접합부 결함은 관로 노후와 무관하지 않다.

접합부가 일체형으로 제작된 신형 하수관로에 비해 구형 관로는 접합부를 따로 시공하게 돼 있는데, 접합부를 메운 시멘트 모르타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이탈하고 주변 토사가 유실되면 결국 싱크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 시내에서 사용 중인 하수관로 중 30년 초과 된 관로는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그 밖에 굴착공사 도중 상ㆍ하수관로를 파손하거나 손상된 채로 도로를 복구한 경우, 얕게 매설된 관로가 차량의 하중으로 인해 깨지는 경우, 노후 상수관에서 고압의 누수가 발생한 경우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 하수관으로 인한 싱크홀 발생 개념도

step 1노후 하수관 균열

step 2동공생성 및 확장

step 3지반 침하 및 붕괴

도로 함몰은 발생 원인에 따라 고유한 진행 패턴을 지닌다. 노후 하수관을 기준으로 보면, 파손 부위 위쪽으로 토사가 유실되는 통로가 생기고 작은 공동(빈 공간)에 불과하던 토사유실 통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위쪽으로 점차 확장한다. 그 위를 지나는 차량의 진동 및 하중으로 인해 포장층의 지지력이 한계에 다다르는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식이다. 굴착 공사 후 복구 시 관로 주변에 매립한 불량재의 틈새나 방치된 폐 관로 사이 빈 공간으로 토사가 유실되면서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월별 싱크홀 발생 빈도와 강수량2014년 7월 ~ 2018년 12월

7월은 통계상 도심 싱크홀 사고가 가장 빈번한 시기다. 최근 5년간 서울 시내 도심 싱크홀 사고 359건 중 69건이 7월에 발생했다. 같은 기간 월평균 강수량이 7월에 가장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교 범위를 넓혀보면 강수량과 도심 싱크홀의 연관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연평균 강수량의 66%가 쏟아진 5월부터 8월 사이에 전체 도심 싱크홀 발생 건수의 58%가 집중됐다. 반면, 강수량이 적은 겨울철엔 발생 건수도 크게 줄었다. 학술 논문 등에 따르면 다량의 빗물이 아스팔트 밑으로 침투하면서 토사가 유실되거나 노후한 하수관로가 호우로 늘어난 수량, 수압을 이기지 못해 도심 싱크홀이 발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동네 하수관로는
얼마나 늙었을까?

서울시 30년 초과 노후 하수관 비율

2017년 12월 31일 기준

0 %

30년 이하

0 %

30년 초과

과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하수관은 얼마나 오래됐을까. 서울시 전체적으로 보면 설치한지 30년 이상을 넘어선 노후 하수관은 전체 연장 9,617km 중 5,272km로 54.8%에 달한다. 그 중에서도 절반을 넘는 2,980㎞ 구간이 무려 41년을 넘어섰고, 설치 연도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관로도 1,736km에 달한다.

자치구별 30년 초과 노후 하수관 비율

2017년 12월 31일 기준

70% 이상

60% 이상

50% 이상

40% 이상

40% 미만

31.6%강남구
69.3%강동구
46%강북구
44.3%강서구
59.6%관악구
67.1%광진구
66.2%구로구
64.8%금천구
42.8%노원구
58.9%도봉구
56.9%동대문구
13%동작구
52.1%마포구
67.1%서대문구
44.9%서초구
57.1%성동구
65.1%성북구
70.2%송파구
52.7%양천구
53.1%영등포구
64.6%용산구
48.6%은평구
67.4%종로구
16.8%중구
52.3%중랑구

자치구별로 보면 30년 초과 노후 하수관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송파구로 70.2%였고, 강동구(69.3%)와 종로구(67.4%)가 그 뒤를 이었다.

예방 대책은 없나?

2014년 석촌호수 인근에서 싱크홀이 잇따라 발생한 이후 정부는 지하공간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위기 대응을 위해 ‘지하안전관리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지하공간통합지도를 구축하는 등 구조 안전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서울과 부산의 경우 지난해부터 GPR(지표 투과 레이더) 탐사를 통해 지반침하 우려가 있는 지역을 찾아내 지반 보강 공사를 하는 등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설물 관리 주체가 제각각인 데다 예산 부족으로 하수관 등 시설물 교체 속도가 노후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광화문 지하공간 통합지도

박창근 교수는 “대부분의 싱크홀은 전조가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알 수 없다”면서 “사고 예방을 위해선 노후 하수관이나 지하 공동구 등 시설물 정비에 예산을 적극 투입하는 한편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철저히 관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