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대한민국의 화두는 ‘헬조선’이었다.

‘노오력’에 지친 청년들에게 희망은 사치라 여겨졌다. 울분이 차올랐다. 하지만 한 순간에 세상을 바꾸긴 쉽지 않다. 벽에 부딪친 청년들은 ‘금수저’ 앞에 자조하고, 그 중 일부는 차별을 통한 비교 우위에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힘든데 이웃나라 청년들의 삶은 어떨 지 궁금했다. 설핏 생각하면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무려 20년을 잃어버렸다니 비정규직 일자리에도 득도한 사토리 세대일 테고, ‘소황제’ ‘소공주’대접을 받으며 자란 중국 청년들은 ‘금수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꽌시(關係ㆍ연줄)’에 환멸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래서 서울과 도쿄, 베이징의 청년들을 직접 만나봤다.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구고, 형ㆍ누나고, 동생들이다. 중국과 일본, 단순히 한국의 과거와 미래라 여기는 이웃나라 평범한 청년들의 삶은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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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본



    취업난? 잘 모르겠는데…

    메이지대 국제일본학부 4학년인 카미야 아키노리(神谷 彰典ㆍ22)는 이미 8월에 일본의 원조 재벌 기업인 미쓰비시 제강에 합격했다. 15군데 정도 면접을 봤다는 카미야는 “취업난이라는 얘기는 잘 못 들어봤다”며 “주변에 취업이 어렵다는 친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2014년 초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대졸 취업률은 96.7%다. 국내에도 관련 기사들이 줄줄이 보도됐다. 통계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도쿄(東京)에서 만난 청년들 역시 “취업이 절대 어렵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2011년에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 이아인(24)씨는 지난해 3월 타쿠쇼쿠대 국제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대신 일본 현지 취업을 선택했다. 이씨는 “한국 친구들 얘길 들어보면 ‘100군데 넣어도 안 된다’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얘기들 뿐”이라며 “일본에선 대기업만 고집하지 않으면 취업이 어렵진 않다”고 말했다. 또 “대학에서 함께 밴드 활동을 한 친구들은 수업도 자주 빠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데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합격했다”며 “일본에선 저런 친구들도 취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일본엔 이력서에 학점을 아예 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펙이 문제가 아니야

    타쿠쇼쿠대 국제학부 4학년인 쇼우지 유리(庄司 結里ㆍ22)가 보여준 이력서는 독특했다. 웨딩 업체에 냈던 이력서는 손글씨로 작성돼 있었고, 심지어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오려 붙이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요구한 내용은 ‘자신의 개성을 살려 웨딩 플랜을 짜보라’는 것. 쇼우지는 “친한 친구들의 특징을 살려 드레스와 메이크업, 결혼식 컨셉은 물론 신혼여행까지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취업의 당락을 좌우하는 건 개성과 창의력이다. 쇼우지는 “면접 질문 중에 ‘백지를 주고 자신을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추상적인 과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캄캄했다”고 말했다. 도쿄로 면접을 보러 온 아오모리(青森)현 히로사키대 4학년 사카 아이코(坂 愛子ㆍ22)도 “상사 명령으로 화성에 가면 뭘 가지고 갈 건가, 라는 문제를 보고 당황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취업에 정도(正道)가 없다 보니, 학생들은 취직준비보다 대학 생활을 즐기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카미야와 쇼우지는 둘 다 농구부 활동을 오래 했다. 쇼우지는 7년간 농구부 활동을 하며 주장까지 역임했다. 카미야는 “평소엔 사회에 나가면 할 수 없는, 학생 때 즐길 수 있는 거면 뭐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며 “취업만을 위해 따로 노력한 건 없다”고 말했다. 또 한가지 일본 대학생들을 옭아매는 것은 ‘신졸일괄채용’ 시스템이다. 기업에서 대학교 3, 4학년을 채용하는 방식인데, 취업 재수가 극히 제한적인 것이 특징이다. 사카는 “신졸채용 때 취업하지 못하면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기 어렵다”며 “이번에 꼭 취직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불안하다”고 말했다.


    비정규직도 괜찮아, 블랙기업만 아니면…

    하지만 일본 대학생들이 걱정하는 건 취업 자체가 아니라 취업 이후의 삶이었다. 일본에선 근로자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이라는 뜻의 ‘블랙기업’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2009년엔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이제 난 한계인지도 몰라’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영화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이제 난 한계인지도 몰라'
    쇼우지는 취업 활동 중에 블랙기업에 대해 책과 인터넷으로 조사하는 데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한 호텔 회사에 합격한 뒤 제일 먼저 한 일도 회사 평판 정보 사이트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케부쿠로(池袋)에서 만난 나카 요스케(仲 陽介ㆍ26)가 니트(NEETㆍ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길을 선택한 것도 오래 일하고 적게 버는 친구들의 삶을 따라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속한 ‘니트 주식회사’라는 곳은 니트들이 모여 프로젝트 단위의 사업을 진행하는 회사인데, 나카는 “회사에 속한 사람들 중엔 직장을 다니다가 월급이 적거나 야근이 잦은 노동 환경을 못 견디고 다음 직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블랙기업이 아니라면, 비정규직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불평등한 처우나 사회적 차별은 없다고 했다. 이아인씨는 졸업 후 입사한 회사가 합병되면서 계약이 해지되는 바람에 새 직장을 찾고 있다. 이씨는 “어제 면접 본 곳은 계약직인데, 정규직과 연봉이나 인센티브에서 차이가 없다”며 “계약 기간이 끝나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100만엔(약 963만원)을 지원해 주는 제도도 있다”고 말했다. 카미야와 쇼우지는 한국의 취업 상황을 듣고 “한국은 대기업에 취직해야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고, 주변 시선도 많이 의식하는 것 같다”며 “일본에선 중소기업 들어 갔다고 인생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주변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고 짠 듯이 똑 같은 얘길 했다.
    혹시 일본 청년들이 저임금 노동의 타성에 젖어 한 말은 아닐까? 쇼우지가 취업한 회사는 연봉 250만엔(2,445만원ㆍ급료가 좋은 편은 아님), 이아인씨는 인센티브 포함 연봉 280만엔(2,738만원ㆍ직원이 9명인 작은 회사)이었다. 도쿄는 교통비와 집값이 비싸지만, 교통비는 대부분의 회사가 지원해주니 집값을 쉐어하우스로 절약한다면 서울보다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도쿄에서 일하는 한 한국인은 “이것저것 따져보면 중소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서울보다 삶의 질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 한 국



    26살 남자의 정의(定義)
    ‘대기업과 중소기업 아니면 취준생’


    “처음 학부 졸업할 땐 삼성이란 타이틀을 달면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지금은 아버지께 ‘저는 삼성 말고 연봉 얼마 주는 무슨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데, 삼성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론 힘든 얘기죠. 결국 어쩔 수 없이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해서 친구분들께 자랑하시라는 말씀 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누가 만든 사회인지 알 순 없지만, 이게 한국의 현실인 것 같아요.”

    서울의 유명 사립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강병우(27)씨는 “한국에서 26살 남자를 두 부류로 나누면 걔는 대기업, 쟤는 중소기업이다”라며 “취업을 앞둔 사람들이라면 ‘누구 아들은 어디 대기업 갔다더라’는 부모님의 우회적인 채근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2013년에 지방 국립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당시엔 일단 취업을 하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전공을 살리기 보단 건축, 정유, 화학, 제약 등 20개 가까운 회사에 원서를 냈다. 합격한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취업을 포기하고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면접 때 ‘잘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원에서 전공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하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뭔지,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지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석사 졸업을 반년 앞둔 지금, 그의 목표는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대기업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맹목적으로 ‘삼성’만을 보고 달려갔던 2년 전과는 다르다. 강씨는 “학부 졸업 때 목표였던 삼성 취업은 내가 원했던 목표가 아니라 사회가, 부모가, 친구가 세운 목표였다”며 “이제는 내가 회사에 가서 어떤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세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석사 학위를 땄다고 회사를 골라갈 만큼 한국 취업시장이 녹록하진 않지만, 뚜렷한 목표가 생긴 덕에 그는 단단해졌다. “취업 시장에서 학사나 석사나 큰 차이는 없기에 불안함은 여전하다”면서도 “이젠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나 스스로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실패가 두렵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연구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강씨는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구실에 파묻혀 지낸다. 취업한 친구들과 통화할 때면 누가 더 오래 회사에, 연구실에 있었는지 경쟁하듯 서로의 힘든 삶을 토로한다. 이런 삶 속에서 희망을, 행복을 얘기할 수 있을까? 강씨는 “일과 돈에서 행복을 찾자면 100점 만점에 49점 밖에 못 준다”며 “오늘보다 내일 더 적게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진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놓진 않았다.
    “저는 도피성 어학연수도 가보고, 도피성 창업도 해봤고, 졸업 유예도 했었고, 막상 대학원 진학도 도피성이 짙죠. 하지만 결국 도망갈 데는 없어요. ‘탈조선’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하면 누군가는 제게 ‘좋은 숟가락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에요. 제가 깨달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두 가집니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지옥이라는 것, 그리고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거죠. 일에서 어떻게 재미를 찾냐구요? 그래서 끊임없이 삶의 목표를 되뇌며 살고 있습니다.”

    “운동은 100등 해도 막막, 공부는 1만등 해도 활짝”

    서울 사당동에 살고 있는 황재용(27)씨는 강병우씨와 동갑내기지만, 현재 상황은 많이 달랐다. 황씨는 최종학력 고졸에 “알바로 담뱃값 정도 버는”실질적 백수다. 하지만 그도 한때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참여했던 열혈 사회학도였다.

    강원 정선군 사북읍이 고향인 황씨는 중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결심했다. 슈퍼마켓과 문방구 자리엔 전당포가 들어섰고, 동네 골목은 모텔촌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문을 연 강원랜드 카지노가 몰고 온 변화였다. 뜻밖에 아버지는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마라톤 선수 출신인 황씨 아버지는 ‘운동선수는 전국에서 100등 해도 살길이 막막하지만, 공부는 1만등 안에만 들어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공부하겠다니 말리진 않으셨다. 그렇게 서울에 온 게 2004년. 고향에서 신문 배달하며 모은 돈도 바닥나고,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의 지원도 이따금씩 끊기다 보니, 17살 어린 나이엔 감내하기 버거운 생활고가 닥쳐왔다. 폐기 직전의 편의점 삼각김밥 2개와 컵라면으로 하루를 때웠고, 고시원 총무가 방문을 두드릴 땐 쥐 죽은 듯 숨죽이기도 했다. 황씨는 “당시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곡절 끝에 수도권 4년제 대학교 사회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무력감의 트라우마는 대학교 4학년 때 다시 찾아왔다. 군 제대 후 집안 문제와 등록금 문제 등에 겹겹이 압박을 느낀 황씨는 “어느 날 그냥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수 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는 제적이었다. 황씨는 자신의 ‘유리멘탈’ 때문이었음을 시인하면서도, “내가 ‘금수저’였다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격려를 받으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배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황씨도 ‘노답’인 ‘헬조선’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에 있어선 강병우씨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TED 강연을 인상 깊게 봤는데, ‘실패도 두렵지만 가장 나쁜 건 끝에 가서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었을 때’라며 ‘각자 스스로 진정 원하는 게 뭔지 깊게 생각해보고 그 성공을 좇는 게 좋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만의 가치관을 세우고 나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면 행복은 따라오지 않겠냐”며 “의욕을 가질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새해엔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중 국



    늬들이 빈부격차를 알아?

    “이 식당에 오는 손님들은 한 끼 식사에 1만위안(180만원)씩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들이에요. 중국의 빈부격차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허베이(河北)성 출신인 추이멍디에(崔梦蝶ㆍ24)는 베이징(北京)의 한 고급 식당 한편에 조그맣게 자리한 찻집에서 일한다. 메뉴에 적힌 차 가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모금 양의 차 한잔 가격이 무려 128위안(2만3,000원), 네댓잔 분량인 한 주전자 가격은 480위안(8만7,000원)이었다. 평균적인 직장인 점심 식비가 30위안(5,400원)인 걸 감안하면 차 한 주전자가 열여섯끼 밥값인 셈이다.
    한국의 금수저 흙수저 얘기를 들은 추이멍디에는 “중국에선 돈과 권력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이 일상 곳곳에 스며있다”며 “일부 일자리나 공무원직은 고위 관료나 부잣집 자녀들이 아니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얻지 못한다”고 했다. 한 국내 중국 관계자는 “중국 관영방송 CCTV는 공채 모집 없이 임원이나 고위직 자제만 꽌시(關係ㆍ연줄)를 통해 뽑는다”고 귀띔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중국의 대학 진학률은 2003년 15%에서 2012년 26.7%까지 매년 1% 이상 증가했다. 1980년대 이후 대학 수와 정원을 크게 늘렸고, 한 자녀 정책의 영향으로 학부모들이 자녀의 교육 지원에 힘을 쏟으면서 지방에서도 대도시 대학에 유학하는 학생들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상황은 늘어나는 대학 졸업생들 모두에게 학력에 걸맞은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순 없었다. 이는 지방 유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추이멍디에는 “많은 대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자기가 배운 만큼의 대접도 받지 못한다”며 “심지어 그 중 상당수는 한 달에 5,000위안(90만원) 정도 버는 나보다 적은 월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추이멍디에는 “그래도 중국엔 기회가 많고,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종학력이 중졸인 그녀가 고급 찻집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대졸자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농민공이나 식당 종업원 등의 직업을 하찮게 여기지만, 반면에 나처럼 기술을 배우거나 공부 외의 방법으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길도 무수히 많다”며 “가게 손님들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존중해준다”고 했다. 이어 “차를 우리는 주전자를 공따오베이(公道杯)라고 한다”며 “차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돈과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공평하다는 뜻”이라고 웃어보였다. 지방 출신이 베이징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고 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 지 궁금했다. “물론 저 혼자 힘으로 베이징에 살려면 집값도 비싸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겠죠. 그래서 아마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 가장 큰 소망은, 10년 후든 20년 후든 제 찻집을 여는 거에요. 쉽진 않겠지만 꿈도 못 꿀 미래는 분명 아닐 거에요.”

    취업난을 바라보는 ‘다르지만 같은’ 세가지 시선
    “취직이 어려워 진 게 아니죠. 많은 청년들은 떠받들려 자란데다, 학력까지 높으니 낮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거에요.” -궈징(郭静ㆍ21) 직업학교 졸업 후 여행사 근무 “취업률이 낮다고 취업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에요. 중국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인재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고학력자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기피하는 건 개인 선택의 문제인거죠.” - 장위링(张玉翎ㆍ19) 허베이민족사범대 학생 “경제 성장이 개인의 취직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결국 취업은 졸업장으로 하는 거죠. 경제가 좋으나 나쁘나 베이징대나 칭화대 졸업생들은 취업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 리위레이(李昱蕾ㆍ26) 선양이공대 졸업 후 선봉금융그룹 근무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세 명의 청년들. 그들이 생각하는 취업난은,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씩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취업 자체가 어려워 진 것은 아니라는 데 인식을 같이 했고, 중국의 취업난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청년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문제라는 점, 개인의 가치관 차이일 뿐이라는 점, 대학 간판이 취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외국에서 중국의 취업난이 정책적ㆍ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분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왜 중국 청년들은 취업난을 스스로의 문제로 돌리는 걸까? 또 다른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중앙민족대 대학원 서방경제학 전공인 차오린마오(曹林茂ㆍ26)는 “중국 정부는 산업구조 조정, 창업 격려, 한 가구 두 자녀 정책 등을 통해, 자원소모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지금의 성장모델을 바꾸고 있다”며 “경제 성장률이 갑자기 추락하지 않도록 잘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국가에 대한 중국 청년들의 무한 신뢰와 자기동일시가 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개인의 영역으로 바꿔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왜곡이, 중국 청년들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까진 일본 청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됐던 자책과 의욕 저하로 이어지기 보단 희망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위레이가 2012년 베이징의 한 잡지사에 취직해 받은 첫 월급은 1,800위안(33만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광고회사, O2O(Online to Offlineㆍ전자상거래 플랫폼과 오프라인 매장이 결합된 유통방식)회사, 금융회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월급은 각각 5,000위안(91만원), 8,000위안(145만원), 1만2,000위안(218만원)으로 뛰었다. 불과 만 3년 만에 몸값을 6배 이상 불린 것이다. 취업난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달랐지만, 희망찬 삶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냈다. .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어느 중국인이든 사회적 문제로 좌절하진 않을 것이다.”- 궈징
    “희망은 자기만족에 달렸다. 난 욕심이 많지 않으니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 장위링
    “나처럼 누구든 노력해서 내공을 쌓는다면 실패할 수 없다.” –리위레이


    “실패하면 좀 어때” 긍정이 만든 청년 창업가

    중국의 소수민족 인재들을 위한 국가중점대학인 중앙민족대는 베이징대, 칭화대, 인민대와 함께 베이징 하이디엔(海淀)구에 위치해 있다. 이 학교에서 최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창업대회가 열렸다. 학부생을 대상으론 2년마다 한번씩 열리지만 대학원생 대상으론 작년이 처음이었다. 총 31개 팀이 출전해 최종 6개 팀을 뽑아 기업과 매칭, 창업 기회를 주는 실전형 대회다.
    이 대회 본선에 진출한 샤오띠(肖迪ㆍ25), 차오린마오(曹林茂ㆍ26), 팡이(方毅ㆍ25)를 만났다. 팀장 역할을 맡고 있는 샤오띠는 “1등 상금은 5,000위안(91만원)”이라며 “하지만 돈보다도 알리바바 등 큰 회사와 함께 내 사업 아이템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1등 욕심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들에게 이번이 첫 창업 대회는 아니다. 학부 때도 각자 대회에 참가했었다. 특히 팡이는 중국 무슬림들을 위한 결혼 중개 사이트 아이템으로 전국대회까지 출전한 경험이 있다. 차오린마오는 “창업에 관심을 가지는 중국 대학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지난 3월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밝힌 ‘대중창업, 만중창신(大衆創業, 萬衆創新)’ 정책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국가통계국의 2015년 3분기 경제지표별 현황 자료를 보면, 면세 혜택과 인큐베이터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중국의 창업 지원 정책이 실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상반기 신규등록기업은 전년 동기 대비 19.4%, 신규등록자금은 43%가 증가했다. 또 올 6월 창업인구가 전체 취업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월에 비해 0.11% 늘었다. 중국의 13억 인구를 감안할 때 전체 취업인구의 0.1%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특히 베이징대 시장연구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주링허우(90后) 대졸자의 15.6%가 창업을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주링허우인 이들은 ‘주링허우를 테마로 한 복합 휴식공간’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사라져가는 어릴 적 추억들을 소환해 감성을 자극하면, 소비성향이 강한 주링허우는 분명 지갑을 열 거란 계산이다. 당연히 치밀한 시장조사 과정을 거친 후 내린 결론이다. 이들은 왜 자석처럼 창업에 이끌리는 걸까? 샤오띠는 “회사에 취직하는 게 더 안정적일 진 몰라도 오랫동안 품어 온 꿈을 실현하지 않으면 평생 아쉬움이 남을 것 같다”고 했다. 또 “실패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잃을 것도 없다”며 “끝내 실패하더라도 재충전하고 더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는 중국의 많은 청년들이 취업난 탓에 정부의 정책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는 창업으로 눈을 돌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만난 청년 창업가들은 “어릴 때부터 키워온 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또 다른 청년을 만났다.
    리핑장(李平章ㆍ24)은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출신으로, 상하이(上海) 명문인 푸단대를 졸업했다. 대학 4학년 때 일본 화장품 회사인 DHC에서 경영 교육생(Management Trainee) 과정을 수료했다. 교육생 신분이었지만, 채용과 연계된 과정이었기 때문에 월급은 8,000위안(145만원)을 받았다. 지난해 주링허우 대졸 취업자들의 평균 월급이 2,687위안(49만원)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 하지만 졸업 후 정규직 전환을 포기하고 베이징행을 택했다. 대학 시절 꿈꿔왔던 여행 회사 창업을 위해 기본기를 다져야겠다고 판단해 중국에서 가장 큰 온라인 여행사에 취직하기로 한 것이다. 여행사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아 무려 1만7,000위안(309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고액 연봉도 그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꿈에 도전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중국엔 정말 아름다운 곳들이 많아요. 특히 제 고향인 쓰촨에서 티벳으로 가는 길의 풍경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베이징, 상하이, 홍콩에 대해선 잘 알지만 청두나 시안(西安) 같은 아주 재미있고 아름다운 도시들에 대해선 전혀 몰라요.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중국의 숨은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리핑장은 그렇게 지난해 9월 ‘하이차이나’라는 여행 회사를 차렸다. 뜻 맞는 동료 5명과 함께 한 집에 살며 밑그림을 현실화하고 있다.
    리핑장은 자신의 궁극적인 꿈에 대해 “큰 돈을 벌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나아가서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중국과 교류하고 중국을 이해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말투와 행동엔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설령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중국 청년들, 다 이렇게 패기만만한 걸까? 리핑장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창업을 하는 것이지,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며 “많은 청년들이 마윈처럼 하늘에 있는 별을 보고 달려가지만, 정작 발 밑의 함정은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에는 ‘띠아오스(屌丝ㆍ중국판 루저. 집없고 차없고 여자친구도 없는 남자를 이르는 말로 2012년 중국 온라인 사이트 유행어 1위를 차지한 신조어)’란 용어가 유행한다”며 “지금 중국은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처럼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알리바바, 텅쉰, 바이두 등 중국 IT 기업의 약진이 많은 이들에게 기회와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이징징(梅京京ㆍ22)은 2014년 3년제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보조교사로 일했다. 월급은 3,000위안(54만원). 하지만 이제는 월수입 5만위안(910만원)의 사업가로 변신했다. 텅쉰이 출시한 중국판 카카오톡인 웨이신(微信)을 통해 다이어트 제품을 판매하면서부터다. 메이징징은 “중국의 빈부격차는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청년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미래는 절대 어둡지 않다”고 말했다.
  • 중 국



    “쉐어하우스 외엔 방법이 없었다”
    모든 나라의 수도가 그렇듯, 베이징은 젊은 중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도시 중 하나다. 행정의 중심지이면서 상업, 산업, 문화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 출신 청년들이 베이징에 정착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첫 번째 이유는 감당할 수 없는 집값 때문이다. 베이징의 주거 문제는 빈부격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베이징은 총6환(環)으로 나뉘는데, 고리모양의 간선도로가 기준이 된다. 메이징징(梅京京ㆍ22)은 “베이징에선 1환씩 중심으로 갈 때마다 집값이 훌쩍 뛴다”며 “갓 졸업하고 시내에서 일하면서 혼자 높은 집값을 감당할 순 없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온 청년들은 집값이 싼 베이징 외곽의 쪽방촌으로 밀려났고, 2009년 대외경제무역대학 롄쓰(廉思) 교수가 출간한 책을 통해 ‘개미족(蟻族)’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베이징의 개미족은 1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주거 빈곤의 현실은 개미족까지 찾지 않더라도, 베이징 청년들의 삶 속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4환과 5환 사이에 위치한 차오양(朝阳)구 왕징(望京)은 베이징 북동쪽의 주거지역이다. 이 곳에서 만난 티엔페이(田飞ㆍ32) 와 왕페이(王飞ㆍ가명ㆍ31)는 한 집의 각기 다른 방에 세 들어 사는 홈메이트다. 베이징 청년들에게 쉐어하우스는 가장 흔한 주거 형태다.
    자신을 베이징 외곽 출신이라고 꼬집어 밝힌 티엔페이는 2006년 대학 졸업 후 수백명이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서 생활했다. 싼 가격을 찾아 선택한 300위안(5만4,000원)짜리 지하실 방에는 침대 한 개 놓을 공간뿐이었고, 샤워실과 화장실은 공동으로 이용했다. 화장실은 100여명이 나눠 써야 했고, 5위안(900원)짜리 샤워실을 이용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2007년 지상으로 옮기며 방값은 500위안(9만원)으로 올랐다. 다음엔 750위안(13만5,000원)짜리 방으로 이사했다. 이 곳에선 아파트의 거실을 두 개로 나눠 그 중 한 공간을 룸메이트와 함께 썼는데, 이 집에선 총 12명이 함께 살았다.
    그리고 2010년 지금 살고 있는 왕징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방 3개 중 제일 큰 방에 혼자 살면서 1,000위안(18만원)을 지불했다. 매년 100위안씩 올라 지금은 1,500위안(27만원)을 낸다. 중국어 개인 교사로 일하면서 월 평균 4,000위안(72만원)정도를 버는 티엔페이에겐 만만찮은 가격이다. 지금은 3명이 살고 있지만, 예전엔 남녀 세 커플과 함께 7명이 살았었다. 그 중 가장 큰 거실엔 신혼부부가 살았다고 했다.
    신혼부부가 쓰던 칸막이 쳐진 거실엔 이제 왕페이가 산다. 월세는 1,600위안(29만원). 지린(吉林)성 출신인 왕페이는 후난(湖南)성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에서 일하다가 2009년 베이징에 왔다. 직장까지 1시간 거리에 처음 구한 집은 3명이 함께 사는 1,300위안(23만5,000원)짜리 아파트 방 한 칸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오피스텔이나 원룸에 살려면 3,500~4,000위안(63만~72만원)은 필요하다. 티엔페이는 “지금은 왕페이와 친하게 지내지만, 다른 홈메이트와 친하게 지낸 적은 없다”며 “서로 신뢰가 부족해 방문을 잠그고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과 불안함을 감수하고서 쉐어하우스에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왕페이는 “월급이 1만위안(180만원)인데, 혼자 살려면 이 중 절반을 월세로 내야 하기 때문에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월급 전부를 월세로 쏟아 부어야 하는 티엔페이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티엔페이는 “하지만 주링허우나 80년대 후반생들은 바링허우와 다르다”며 “비록 10년 차이지만 경제력이 든든한 부모의 도움으로 혼자 사는 친구들도 꽤 있다”고 말했다.


    지방 출신 발목 잡는 호구(户口)… 애증의 베이징

    두 번째 이유는 집이 있더라도 호구(户口)가 없으면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위레이(李昱蕾ㆍ26)는 차오양구에 혼자 산다. 5환 바깥 동네지만 살기 나쁜 곳은 아니다. 2012년 베이징에 오면서 200만위안(3억 6,000만원)에 64㎡(19평)짜리 아파트를 샀다. 부모님이 계약금 140만위안(2억5,000만원)을 지원해주셨고 나머지 60만위안(1억1,000만원)은 대출을 받아, 월급 1만2,000위안(218만원) 중 매달 5,000위안(90만원)씩 스스로 갚고 있다. 리위레이는 “어차피 월세 낼 바에야 집을 사는 게 투자 차원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높은 계약금을 낼 여유가 없고, 베이징에 오래 살 생각도 없기 때문에 집을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통 지방 친구들은 남자는 35살, 여자는 30살쯤에 고향으로 많이들 돌아간다고 했다. 그들이 귀향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베이징의 호구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의 호구는 특정 지역의 합법적인 거주권이며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호구가 없는 지방 출신들은 권리나 혜택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베이퍄오족(北漂族ㆍ고향을 떠나서 베이징에서 일하거나 생활하는 사람들)들 중 일부는 정부가 베이징 호구제한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호적제도개혁조사에 응답한 도시의 시장들은 모두 호구제 완화에 반대했다. 제한된 특권을 나누기 싫기 때문이다. 리웨레이 역시 베이징 호구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베이징에 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베이징 출신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며 “타지 출신끼리 결혼해 낳은 자녀는 베이징 호구를 얻지 못해 질 좋은 공립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한 국



    “불법 이민자와 다르지 않은, 서글픈 삶”
    중국에 쪽방촌과 쉐어하우스가 있다면 한국엔 고시원과 좁아터진 원룸이 있다. 공간을 혼자 쓰니까 쾌적할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도긴개긴이다. “이 헤드폰, 10년 전에 거금 주고 산 거에요. 지금은 잘 안 쓰지만 당시엔 이거 없인 잠을 잘 수가 없었죠.”
    황재용(27)씨가 두툼한 헤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고시원과 리빙텔을 전전하던 때, 옆 방에서 들려오는 원치 않은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이 헤드폰은 생필품이었다. 2004년 상경해 종로구 창신동의 고시원에 머물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 살고 있는 7평(23㎡)짜리 사당동 반지하 월셋방(보증금 1,000만원, 월세 33만원)에 살기까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작년 2월부터 이 방에 살았는데, 요새도 종종 방에 들어올 때 감회가 새롭다”며 “상경 11년 만에 처음으로 내 명의로 전입이 가능한 집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누나가 보증금을 내 주지 않았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고시원, 친척집, 친구집, 아는 분 집, 기숙사, 리빙텔 등을 전전한 게 11년이에요. 거처를 계속 옮겨 다니다 보니 서울 웬만한 동네에서는 다 살아 봤어요. 창신동, 동대문, 수유리, 가락시장, 방이동, 왕십리, 동인천, 동암, 부천 심곡동…”
    끝도 없이 동네 이름을 대던 황씨는 “한 10년 정도 쓰던 여행가방이 있는데, 이사를 하면 짐을 풀지 않고 가방만 열어놓는다”며 “짐 싸고 옮겨 다니는 삶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 한구석에 가방만 펼쳐놓고, 빨래한 옷은 말려서 다시 가방 안에 정리한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가능하도록. “제가 요즘 ‘개선문’(독일 출신 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란 소설을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파리로 숨어든 독일인 불법 이민자에요. 언제 나치의 검열을 받을지 모르니까 짐 가방만 열어놓고 살더군요. 마치 지금의 저처럼요. 불법 이민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제 행색이 새삼 서글프더군요.” 메뚜기 같은 생활을 하던 황씨에게 그나마 잊지 못할 행복감을 선사했던 곳은 리빙텔이었다. 방에 딸려 있는 조그만 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단 사실이, 그에겐 지난 11년 동안 가장 황홀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남의 불행에서 내 행복을 찾아야 하는 슬픈 현실

    “아~~ 이거 어머니가 보시면 안 되는데……. 처음 방 구할 때도 어머니는 슬퍼하셨어요. 전 잘 구했다고 좋아했는데.”
    2평(6.6㎡) 남짓한 강병우(27)씨의 방은, 살림살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제외하면 장정 한 명이 약간 여유있게 누울 공간 정도 밖엔 남지 않았다. 대학원생 강씨와 고졸 백수 황재용씨를 비교해보면,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주거환경 만큼은 황씨가 비교우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방을 구해주는 입장에서 어머니는 슬펐을 법했다.
    하지만 강씨는 되레 “이 동네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로 따지면 이 집 만한 곳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씨의 거처는 이래봬도 전세 5,000만원짜리다. 전세 매물 자체가 없으니 전셋집을 구한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전세금은 아버지가 대출을 받아서 마련했다. 강씨는 “이 집에서 언덕 하나를 더 올라가면 7,000만원짜리 전셋방이 있다”며 “여름이면 땀 한 바가지씩 쏟아야 되는데 벽은 곰팡이로 도배된 그 방에 비하면 지금 사는 곳이 훨씬 쾌적하다”고 했다.
    대전에서 학부를 나온 강씨는 “서울에 사는 대전 친구들이랑 얘기하면 한참을 웃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주거 격차 때문이다. “대전에선 5,000만원이면 20평(66㎡)짜리 아파트도 구할 수 있다”며 “친구들과 셋이서 월세 45만원인 투룸에 살았는데, 방 한 개 공간이 지금 이 곳의 세배는 됐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서울에 와보니,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고 했다. 강씨는 “불만이 있다면 방음이 안 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기타를 맘대로 못 치는 것 정도”라며 “하지만 남들과 비교해 상대적 행복을 찾아야 하는 현실은 몹시 불행하다”고 말했다.
  • 일 본



    일본 싱글족의 더불어살기가 실험인 이유
    일본에서 쉐어하우스가 사회적 이슈가 된 건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후쿠시마 미노리(福島みのり) 도코하대 교수는 “2000년대 초부터 ‘봄낭만’(후지TVㆍ2002) ‘룸쉐어의 여자’(NHKㆍ2005) ‘라스트프렌즈’(후지TVㆍ2008) ‘테라스하우스(후지TVㆍ2012) 등 쉐어하우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리얼리티 쇼 등이 전파를 타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알려졌다”며 “더불어 공유 경제를 소개하는 책들이 화제가 되면서, 나눔과 유대를 통한 새로운 소비패턴, 라이프스타일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쉐어하우스 임대를 전문으로 하는 히츠지 부동산에 등록된 쉐어하우스 매물은 2005년 25개에서 2008년 381개, 2012년 1,100개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일본의 주거 빈곤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수렴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일본의 집 구조는 대개 얇은 미닫이 문으로 구분됐으나, 패전 후 맨션의 보급과 함께 익숙지 않았던 프라이버시 개념이 급속히 전파됐다. 프라이버시 개념이 싱글족의 주거문화에 포개지면서, 일본 청년들은 가족과 함께 살거나 아니면 혼자 사는 양자택일 외엔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주거 문제가 파라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ㆍパラサイト シングルㆍ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독신자), 네트카페 난민(24시간 영업하는 인터넷 카페나 만화방 등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처럼 가족 혹은 개인의 영역에서만 불거졌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제의 기저에는 일본 청년들의 관계성 약화가 깔려있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다’혹은 ‘놀 친구는 있지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인식에서 독자 생존의 매커니즘은 더욱 활발하게 작동했다. 2007년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홈리스의 60% 이상은 부모와 연락두절 상태였으며, 그 중 30%는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쉐어하우스 ‘비용절약 +α’

    일본 싱글족이 쉐어하우스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거비 절약이다.
    이아인(24)씨는 대학교 때 5만7,000엔(56만원)짜리 월셋방에서 친구와 함께 살았다. 방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도시락 체인점에서 시급 900엔(8,800원)인 아르바이트를 3년간 했고, 4년간 매달 장학금 4만8,000엔(47만원)을 꾸준히 받았다. 덕분에 졸업할 땐 유럽여행 비용도 모을 수 있었다. 지금은 메구로(目黑)구의 5평(16.5㎡)짜리 원룸에서 월세 9만엔(88만원)을 친구와 나눠 내고 있다. 이씨는 “룸쉐어를 하지 않으면 여행이나 여가 등은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친분 중심의 룸쉐어보다 더 개방된 형태인 쉐어하우스는 창업과 연계해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나카하라 타쿠(中原 琢ㆍ26)는 2014년 9월 규슈(九州)지방의 사가대를 졸업한 뒤 선배의 제안으로 쉐어하우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동업자 선배와 각각 50만엔(489만원)씩을 출자해 만든 밑천으로, 도쿄 세타가야(世田谷)구 코마자와 대학교 인근의 빈집 산 뒤 ‘히다마리’라는 이름의 쉐어하우스로 새단장했다. 나카하라는 “일본에선 모르는 사람과 교류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사업을 시작할 때 걱정했다”며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함께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잠재돼 있다”고 말했다. 또 “아직은 혼자 사는 사람이 많지만, 시간이 흐르면 쉐어하우스에 살려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곳에 사는 미히타 마호(21)와 니콜 갤러거(Nicole Gallagherㆍ33) 모두 주저 없이 “쉐어하우스를 추천한다”고 하니, 나카하라의 말이 단지 사업가로서의 바람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월세 4만엔(39만원)짜리 쉐어하우스에 살면서 비용 절약은 물론 관계 형성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캐나다 출신인 갤러거는 올해로 일본 생활 7년 차인 외국어 교사다. 5년을 혼자 살았다는 그녀는 “친구 한 명 없는 도쿄에서, 매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 만으로도 대만족”이라며 “일본인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일본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구마모토(熊本)현에서 전문대를 졸업하고 건강식품 업체에 다니던 미히타는 10월 중순쯤 도쿄에 왔다. 거처를 찾던 중 초기비용(일본은 세입자가 부동산에 내는 중개료 외에 집주인에게도 사례비를 내기 때문에 초기비용이 많이 든다)을 아낄 수 있는 쉐어하우스를 선택했다. 줄곧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공동생활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전 직장에서 월급 12만엔(117만원)을 받으며 1년 반 동안 100만엔(978만원)을 모았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은 이유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그 돈으로 푸드 코디네이터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다. 미히타는 “기숙사와 달리 쉐어하우스엔 직업과 경험이 다양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어 좋다”며 “고민을 나눈다거나 잘 모르는 도쿄 생활에 대해 조언을 받는 것, 즐거운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혼자 살 땐 누릴 수 없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또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처음엔 비록 힘들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관계 형성이,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일본 청년들의 ‘자기 책임성’문제를 개선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관계를 넘어 비즈니스로

    도쿄 중심가인 시부야구에 있는 ‘더 쉐어’는 기업형으로 운영되는 쉐어하우스다. 리모델링 임대 전문 부동산 회사인 리비타(ReBITA)는 이 곳 외에도 도쿄, 사이타마(埼玉)현, 가나가와(神奈川)현 등에 총 15개의 쉐어하우스 건물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12월에 오픈한 ‘더 쉐어’는 1층엔 상가, 2층엔 오피스, 3~5층엔 주거, 6층과 옥상은 공용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주거 공간은 11.6~21.3㎡까지 3가지 크기의 방으로 나뉘며 월세는 8만~11만1,500엔(78만~109만5,000원) 선이다.
    ‘더 쉐어’를 관리하고 있는 미카미 준지(三上 純治ㆍ28)는 “도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가격이면 인근 원룸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며 “도호쿠(東北) 대지진을 계기로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것도 쉐어하우스를 찾는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나아가 “시간과 공간을 보다 유익하게 공유하고자 하는 프리랜서들에겐 오피스와 하우스가 결합된 이 곳의 형태가 큰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즉, 생활 공간에서 정보ㆍ인적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며 입주민간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입주민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역 정보를 공유하는 ‘소셜맵’은 쉐어하우스 차원에서 크라우드 소싱(crowdsourcing)이 구현된 사례다. 미카미는 또 실제 입주민간 교류가 비즈니스로 발전된 사례도 소개해 줬다.
    #지방에 본사를 둔 의류 수입 판매 회사를 경영하는 40대 A씨는 도쿄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2011년 ‘더 쉐어’에 입주했다. 사업 확장에 따라 직원 채용을 검토하던 A씨는 다른 입주민인 20대 여성(IT 컨설팅 기업 근무)과 30대 남성 2명을 채용했다. 평소 일상 생활에서 서로의 인간성과 직무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쉐어오피스를 계약한 20대 사진 작가와 쉐어하우스 거주자인 20대 카피라이터, 30대 웹디자이너가 모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더 쉐어’에서의 일상을 찍은 사진에 카피를 달고, 디자인을 다듬었다. 리비타는 이 제작물을 구매해 홍보에 활용했다.
    미카미는 “최근엔 대기업에 근무하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관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자기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요즘 청년들은 과거의 버블세대와 달리 일은 열심히 하지만 교류나 여가의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주거 공간을 공유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소통과 교류의 장을 형성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2012, 2013년쯤 쉐어하우스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돈을 버는 직장인들보다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 많아, 관계보다는 비용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쉐어하우스 관련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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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국



    ““나는 ‘결혼 포기자’였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까지 해올 수 있는데~?”
    지난해 1월1일부터 사귀기 시작해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최성욱(33)ㆍ서영은(31)씨 커플은, 막상 결혼 얘기가 나오면 민감해진다. 6월쯤부터 암묵적으로 결혼을 전제한 만남을 해 오던 이 커플이 입 밖으로 ‘결혼’ 얘기를 꺼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서씨가 답답한 마음에 결혼 구상을 물어보면 최씨는 두루뭉술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최씨도 맘이 편치 않았지만, 그렇게 순간을 모면하는 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한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자란 최씨에게 어머니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성장 환경 탓에 단란한 가정에 대한 욕구는 더 강했지만 매번 돈이 발목을 잡았다. 최씨는 “서른 전에 어떻게든 학자금 대출 다 갚고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 마흔쯤 돼서야 결혼 밑천을 모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며 “하지만 어떤 여자가 내 상황을 감수하고 10년 가까이 기다려 줄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또 “경제적으로 힘든 와중에 꾸역꾸역 결혼이란 걸 하면 외려 더 불행할 것 같았다”며 “삶이 돈에 매몰되고, 도움 받은 어느 한 쪽 집에 미안해하며 죄인처럼 사느니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청년들이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포기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도, 최씨만의 얘기도 아니다. 2012년 한국소비자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의 40.4%, 여성이 19.6%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최씨는 “지금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친구를 만났지만,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붙들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차일피일 얘기를 미룬 것도 “솔직하게 모아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얘기하면 여자친구가 떠날까 봐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며 “내가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을 때 고해성사하듯 얘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왜 그들은 모은 돈이 없을까?

    최씨가 서씨의 답답증에 “이래저래 1,000만원쯤 준비할 수 있다”고 화답을 한 건 두달 전쯤이다. 서씨는 “연애할 때 ‘이렇게 돈이 없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어렵게 만났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30대 초반인 그들에겐 왜 결혼 자금도, 하물며 연애할 돈도 없었을까? 서씨는 “결코 우리가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최씨는 6년째 이어오던 기자생활을 접고 대안언론을 꾸려가고 있었고, 바리스타 경력을 갖고 있는 서씨는 워킹할리데이로 호주에서 지내다 막 국내에 들어온 참이었다. 서씨가 최씨의 대안언론에 필진으로 참여하며 인연이 닿았다. 서씨는 “호주에선 아르바이트 하면 1시간 시급이 1만7,000원 정도라 밥 한끼 먹고, 커피 한잔 마셔도 남지만 한국은 한끼가 채 안 된다”며 “이렇게 무력감에 빠져 지낼 바에야, 열심히 일 해서 회사 배 불려줄 바에야 우리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문화 혹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역 커뮤니티에 기반한 재능기부를 대안언론의 수익 모델로 삼았었다. 하지만 맨 주먹으로 뛰어든 그들에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모아뒀던 종잣돈은 사라지고, 빚만 남았다. 서씨는 “나는 바리스타로 7년 경력이 있고, 오빠는 기자 6년 경력이 있으니 지금은 돈이 없어도 매달 200만원씩 모아 나가면 빚도 갚고, 남들처럼 결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며 “하지만 그 와중에 몸이 아파 병원비 지출이 생기는 등 돈이 모이지 않고, 알아 볼수록 터무니없는 결혼 자금에 맥이 빠졌다”고 했다.
    “연애와 결혼은 가난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서씨는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몇 달 전 정말 오랜만에 오빠랑 스파게티를 먹었을 때”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대안언론에서 길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쓸 당시 돈이 없어 연애를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던 이들에게 스파게티는 사치였다. 메뉴선택은 가격이 결정했고, 먹는 것조차 줄여야 되는 상황이 되니 가난은 피부에 와 닿았다. 스스로 불쌍해지고, 위축되고, 서러웠다. 가난에 지쳐 각자 재취업을 선택했고, 연애 후 처음으로 스파게티를 먹던 날이었다.
    “몇 개월 만에 처음 먹었어요. 우리도 이제 이런 걸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죠. 예전 같았으면 별 거 아닌 일상이지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 같아 정말 행복했어요.” 서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울먹였다. 하지만 그 울음 속에 섞여 있을 묘한 감정들 속엔 또 다시 닥친 현실의 벽에 대한 야속함도 녹아있었을 터.
    스스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다고 밝힌 서씨는 “주변에 결혼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 보면, 20대 후반에 남자가 마련해 온 4억짜리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의 59㎡(18평) 아파트 전셋가가 평균 2억9,0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보고 식겁했다”며 “지금 돌이켜 보면 4억짜리 아파트 구해오는 남자들도 다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 대기업 임원인 그들의 부모님 자산으로 집을 구한 금수저들이었다”고 말했다.
    웨딩컨설팅 업체인 듀오웨드가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5년 결혼비용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서울ㆍ수도권에서 결혼한 부부의 주택 비용은 1억8,089만원이었으며, 신랑은 평균 1억5,231만원, 신부는 8,567만원을 결혼비용으로 지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씨는 이런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다. 나아가 우리 일상 속에 만연해 있는 경제적 기준이 잘못 설정돼 있다고 토로했다. “1,000만원 단위 차 바꾸는 걸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고급스러운 데이트와 해외여행도 당연한 일상처럼 얘기하는 데, 스스로 결혼자금 모으면서 그렇게 다 누리고 사는 게 대한민국 몇%에게 해당되는 삶인지 궁금하다”며 “하지만 이미 그런 삶은 평균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사회적 인식 속에서 내 노력은 보잘것없는 게 돼 버린다”고 말했다. 또 “학생 때는 비록 단칸방에 살더라도 공부든 운동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결혼 앞에서 ‘노력’이나 ‘성취감’같은 단어는 배제되기 십상”이라며 “부모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둘이서만 미래를 설계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은 소통에 있다

    서씨는 “몇 평 이상 아파트, 얼마짜리 가구와 자동차 등 비상식적인 사회적 통념이 수많은 루저를 양산한다”면서 “청년들이 과거세대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소통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못난 모습 보이기 싫어서 자신들의 힘든 처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청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님께 잠깐 도움을 받더라도 차용증을 써서 빌린 후 갚아 나가는 얘기, 정책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듣고 나니 지금 내게 닥친 문제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어요. ‘너만 힘들고 포기하려는 게 아냐. 용기를 내’라는 메시지를 공유하고 나아가 결혼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정착시키려면 청년들 스스로 솔직해져야 할 것 같아요.” 서씨는 경쟁이 안될 바에야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부터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마치 몇 달 만에 스파게티를 먹으면 행복했던 것처럼. “임대주택에 당첨되면 돈 모아서 넓혀가면 된다”며 “남들과 보폭이 다르더라도, 비록 작은 성취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거란 기대감이 생겼다”고 했다. 최씨는 세간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 조촐하게 ‘작은 결혼식’을 치르고 싶다고 했다. “신부는 뭐 하는 사람이고, 신랑은 어떻고 하는 얘기들 때문에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울적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며 “우리가 자주 걸어 다녔던 터널에서 웨딩마치를 할까도 생각했었다”고 했다. 최씨는 “다들 아닌 척해도 다 거기서 거기”라며 “결혼 때문에 힘들어하는 청년들이 우리 얘기 듣고 힘내서, 사랑하는 연인만 바라보며 꿋꿋이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중 국



    “월광족(月光族)으로 살아도 돼, 난 여자니까”

    베이징도 서울만큼이나 결혼하기 힘들다. 특히 남성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임금에 비해 턱없이 비싼 집값 때문에 고충이 크다. 임금대비 집값은 베이징이 서울보다 비싸면 비쌌지 결코 싸지 않다. 신혼집과 결혼 비용 일체를 남성이 떠 안는 중국 특유의 결혼 문화 때문에 부담은 배가된다. 여기에 베이징에 사는 지방 출신 여성들은 호구문제 때문에 베이징 출신 남성만 찾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 배우자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것도 남성에겐 감내하기 힘든 현실이다. (► 관련기사:‘남아선호 비극… 中 3,500만 노총각 분노 폭발 직전)
    왕징에서 만난 왕페이(王飞ㆍ가명ㆍ31)는 자신을 ‘월광족(月光族ㆍyuè guāng zúㆍ2000년대 중반부터 유행한 말로 한 달 월급을 저축하지 않고 다 쓰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적지 않은 1만위안(180만원)의 월급을 한달 만에 다 써버린다. 왕페이는 “옷 사고, 화장품 사고, 맛있는 거 먹으면 남는 게 없다”며 “미혼 여성 대부분이 월광족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거침없이 월광족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결혼 자금은 남자의 몫”이란 인식이 강하기 때문. 리위레이(李昱蕾ㆍ26) 역시 “비상시를 위해 저축을 하긴 하지만 결혼할 때 여자는 돈을 적게 내기 때문에 결혼 자금으로 모은 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티엔페이(田飞ㆍ32)는 최근 4살 터울의 남동생 신혼집 구입을 위해 대출을 받았다. 결혼을 준비 중인 동생이 여자친구 부모님으로부터 ‘베이징에 집이 없으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베이징 외곽에 80만위안(1억4,400만원)짜리 소형 아파트를 사면서 아버지가 50만위안, 티엔페이가 30만위안을 대출 받았다. 티엔페이는 “일단 신혼집을 장만하긴 했지만, 너무 외곽이라 여자 쪽 집에서 맘에 안 들어 할까 봐 걱정”이라며 “언젠가 내가 결혼할 때도 남자 쪽에서 집을 준비해 올 거라 생각해 큰 맘 먹고 대출 받았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의 결혼, 직접 준비해 봤더니

    베이징에서 만난 여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평범한 남자가 혼자 힘으로 베이징에서 결혼하는 건 꿈 같은 얘기다. ‘중국 남자들은 결혼하려면 차와 집이 있어야 한다’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여자들의 기대치는 높은데, 결혼비용을 부담하기엔 수입이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결혼포기자와 같은‘훈부치(婚不起)’라는 신조어가 생긴 이유다.
    결혼 준비의 첫 관문은 신혼집 마련이다. 중국의 한 결혼 정보사이트 조사에선 여성 응답자의 72%가 ‘집 없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응답했다. 2000년대 후반 중국에선 ‘바이누(白奴ㆍ화이트컬러 노예)’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그 중 으뜸은 ‘집의 노예’라 할 수 있는 ‘팡누(房奴)’다. 2014년 베이징의 80㎡(24평) 평균 주택구입 비용은 288만위안(5억2,000만원)이고, 베이징대가 조사한 베이징 대졸자 평균 초봉이 3,109위안(56만원)이니 임금 상승률을 반영하더라도 월급을 모아 집을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중국 중산층의 결혼 비용은 얼마나 들까? 신혼집과 예식장 가격을 실제로 알아봤다. 바링허우 부모들은 외동 자녀의 평생 한 번뿐인 결혼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눈높이를 높게 잡았다.
    신혼집은 공원 등 녹지가 많고, 주요 대학들이 밀집해 있으며, 중관춘(中关村)의 오피스 지역도 멀지 않아 비교적 좋은 주거 환경을 갖추고 있는 하이디엔구로 정했다. 부동산 직원 왕하이타오(王海涛)는 먼저 베이징에 얼마나 살았는지 물었다. 지방 사람은 5년 이상, 외국인은 1년 이상 베이징에 거주해야 집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문제 없다고 하자 본격적으로 매물을 보여줬다. 10㎡(3평) 안팎의 단칸방들도 월세가 3,000위안(54만원)을 넘나들었다. 그래도 신혼집인데 월셋방을 구할 순 없다고 하니 매매가 가능한 원룸과 아파트들을 보여줬다. 왕하이타오는 “이 동네는 3~4환에 위치해 있고, 교통과 교육 여건이 좋아 비싼 편”이라며 “대신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에 투자 목적이라면 추천한다”고 말했다. “작년에만 작은 집은 50만위안(9,000만원), 큰 집은 30~40만위안(5,400만~7,200만원)씩 올랐다”고 했다.
    가격대는 건축년도와 위치,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비싼 곳은 1000만위안(18억원)을 호가했다.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도 울고 갈 가격대다. 이 부동산에 나와 있는 하이디엔구 매물의 ㎡당 평균 가격은 5만2,082위안(940만원). 지난해 7월 KB국민은행 조사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의 ㎡당 평균 매매가는 613만1,000원, 가장 비싼 강남구는 1,122만원7,000원이었다. 하이디엔구는 서초구와 용산구 사이쯤 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빈집을 보러 갔다. 왕하이타오는 “이 곳엔 농업은행 직원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며 “주민들의 수준이 높은 동네”라고 했다. 86㎡(26평)인 이 아파트의 가격은 440만위안(7억9,000만원). 아무리 뜯어봐도 서울의 아파트보다 훨씬 후줄근한데 가격은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와 맞먹었다. 왕하이타오는 “신혼 부부들은 방 2개에 60~70㎡(18~24평)대 아파트들을 선호하는데, 대부분 400만위안(7억2,000만원)부터 시작”이라며 “가격이 부담되면 59㎡에 350만위안(6억3,000만원)짜리 원룸형도 있다”고 말했다.
    신혼집 다음은 결혼식이다. 온라인 결혼 컨설팅 업체인 핀라웨딩넷(品啦结婚网)의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의 67.3%는 ‘내 결혼식은 반드시 친구 결혼식보다 화려해야 한다’고 응답할 정도로 호화 결혼식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따라서 하이디엔구의 고급 호텔로 물색, 엠파크 그랜드 호텔(世纪金源大酒店)을 선정했다. 이 곳은 따로 대관료는 없으며 하객 식대를 합산해 가격을 정한다. 한 상에 10명 기준으로 최저가는 4,888위안(88만원)이지만, 일반적으로 5,280위안(95만원)짜리를 선호한다고 했다. 하객을 400명 기준으로 5,280위안짜리 식사를 선택하면 결혼식 비용은 21만1,200위안(3,800만원)이 든다.
    중국백성혼례류정(中国百姓婚礼流程)에 따르면 중국의 중산층 이상 결혼 소요 비용은 약혼(33만위안), 혼수(10만위안), 예물(13만위안), 웨딩사진(2만위안) 등 총 100만위안 가량이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 신혼집 400만위안, 결혼식 21만위안, 신혼여행 2만위안을 합산하니, 베이징에서 결혼하려면 523만위안(9억4,370만원)이 드는 셈이다.
  • 일 본



    곤카츠(婚活), ‘취집’을 꿈꾸는 여성들

    한국과 중국의 결혼 문제를 남성의 입장에서 접근했다면, 일본의 결혼 문제는 여성의 입장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일본 남자들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회에 진출해, 결혼을 계획할 30대가 되면 나름대로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청년문제를 통칭하는 ‘와카모노(若者)론’에서 여성은 항상 논외였다. 남성과 달리 부모와 함께 사는 여성 비정규직이 많은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총무성의 경제활동 인구 조사에 따르면 2010년 25~34세 남성의 13.2%, 같은 연령대 여성의 41.6%가 비정규직에 종사했다. 1990년엔 각각 3.2%와 28.2%였고, 나이대를 높여 35~44세를 살펴보면 남녀 비정규직 비율은 3.3%와 49.7%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즉 남성과 달리 일본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비정규직 비율이 높았단 얘기다. 일본에서 결혼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건 30대 자녀를 둔 부모세대가 은퇴하면서 수입이 급감한 2000년대 후반부터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파라사이트 싱글 자녀에게 부모가 더 이상 지원을 해 줄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모의 경제력이 약해지자 젊은 비정규직 여성들은 새로운 비빌 언덕이 필요해졌고, 그 대안은 결혼이었다. 이는 청년 스스로의 욕구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 등을 떠밀려 결혼 상대를 찾아나서는 형국이 됐다. ‘결혼 활동’이라 해석할 수 있는 곤카츠(婚活)는 2008년 ‘곤카츠의 시대’라는 책이 출판된 이후 급격히 유행했다. 이 책은 결혼을 하려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는 부모세대의 욕구가 투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실제로 2011년 일본 내각부가 20~30대 남녀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혼자의 63.7%가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답할 만큼 일본 청년들은 결혼을 위한 노력에 인색했다. 자의든 타의든 일본 사회에서 결혼은 파라사이트 싱글 여성들의 삶을 바꿀 대안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젊은 여성들에게 ‘취업(일) 대신 결혼’이라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2012년 일본 내각부 조사가 이를 뒷받침 하는데, 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44%가 ‘아내가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3년 전보다 16% 증가한 것이다. 후쿠시마 미노리 도코하대 교수는 “여대생을 포함해 전업주부를 꿈꾸는 20~30대 여성이 증가하고 있다”며 “이는 ‘일벌레 남편’과 ‘가정주부 아내’라는 부모세대의 젠더화된 생존 전략이 다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곤카츠에 숨어 있는 두 가지, ‘빈곤’그리고 ‘관계’

    일본의 경제 시스템은 남성이 여성을 부양하도록 유지돼 왔다. 이는 남성이 돈을 벌고,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책임진다는 뿌리깊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경제적 지위가 흔들린 남성들이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면서, 일본의 전통적인 남녀 역할 가치관은 사회문제로 이어졌다. 여성의 생존 방식 중 하나였던 결혼이 부모에게 기대는 삶으로 치환될 수밖에 없었고, 경제적으로 기댈 수 있는 부모조차 없는 여성들은 생존의 기로에 놓이게 됐기 때문이다.
    2011년 아사히 신문이 보도한 ‘독신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빈곤’과 2014년 방영된 NHK의 다큐멘터리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 심각해지는 젊은 여성 빈곤’은 여성 빈곤의 심각성을 다루고 있다. 싱글 여성들의 수입은 십수년전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었으며, 힘겹게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의 삶은 ‘걸스 푸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늘 존재했던 문제지만, 미혼율이 증가하면서 두드러진 것이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현재 와코대 교수인 다케노부 미에코(竹信 三惠子)는 ‘현대사상’ 2013년 9월호에 실은 글에서 곤카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남녀가 경제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일본에서 남성 고용이 악화돼 가는데도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그러면 결국 남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결혼할까 말까’가 아닌 ‘결혼할 수 있을까, 없을까’가 된다. 결혼 이외에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좁은데, 예전처럼 결혼할 수 있는 남자들은 확 줄었다. 그 결과 결혼의 장벽은 대단히 높아졌고, 좁은 문을 뚫기 위한 필사의 곤카츠가 생겨난 것이다.” 빈곤이 곤카츠에 숨어 있는 첫 번째 키워드라면, 두 번째는 관계다. 2011년 발생한 도호쿠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에서 가족의 가치는 눈에 띄게 자주 언급된다. 미디어는 ‘가족의 끈’을 강조하며 개인화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 변화를 요구했다. 더불어 저널리스트인 시라카와 모모코(白河 桃子)가 2011년 출간한 책에서 언급한 ‘지진혼(震災婚)’이라는 말도 유행했는데, 이는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던 미혼들이 대지진을 계기로 결혼을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얘기다. 혼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관계 형성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그러나 마음을 먹었다고 다 뜻대로 되진 않는 법. 일본의 많은 청년들이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현상은, 결혼 상대자인 이성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곤카츠를 소재로 한 여러 일본 드라마에서는 결혼 정보회사를 통해 만난 남녀가 서로에 대한 이해나 사랑 없이, 조건만 놓고 결혼을 위한 만남을 이어간다. 또 만남을 이어가기 어려운 경우, 두 사람이 소통을 통해 해결하기 보다 컨설턴트에게 받는 개인 레슨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문제의 원인과 해법은 관계가 아닌 개인 차원으로 수렴된다. 어찌 보면 곤카츠는 일본 청년들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사회가 던진 하나의 화두인 셈이다.
  • 일 본



    관계 안에서 도약을 꿈꾸다

    2010년 NHK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무연사회(無緣社會)’는 충격적인 고독사 사례들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혈연마저 붕괴된, 철저히 고립된 현실 속에서 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비단 고독사의 문제가 아니라도 일본 사회 곳곳엔 무연사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도쿄의 대표적인 사무실 밀집 지구인 지요다(千代田)구의 마루노우치(丸の內)에선 점심시간에 공원 벤치 등 야외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선 ‘혼밥’이라 불리며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주목 받고 있지만, 일본에선 흔한 일상이다. 식사시간 만이라도 관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 많은 청년들이 회사를 그만 두는 이유로 과도한 업무량과 함께 관계의 피로감을 꼽을 만큼 일본 사회에서 관계 스트레스는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 청년들 사이에선 오히려 관계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신 이들이 추구하는 관계는 전통적인 조직문화에서 나타나는 경직된 관계가 아니라 느슨하고 수평적인, 상생을 지향하는 관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도쿄 신주쿠(新宿)구에 위치한 슈토모(就とも)카페는 도쿄와 지방 학생들의 취업 격차를 없애자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 카페 운영자인 다케다 요코(武田 陽子ㆍ32)는 “일본에선 대부분 혼자 취업 준비를 한다”며 “취업의 슈(就)와 친구라는 뜻의 토모다치(ともだち)를 합쳐 친구들과 함께 여럿이 정보 교환도 하면서 취업을 준비하면 더 효율적이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지방 학생들에게 익숙지 않은 모의 면접이나 토론 연습도 여럿이 모여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게 슈토모 카페의 장점 중 하나다. 이날도 아오모리(靑森)현과 미야기(宮城)현에서 온 학생들이 면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케다는 “면접이 한창일 땐 60~70명이 모여있다”며 “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룹을 지어 면접과 토론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니트를 변화시킨 관계의 힘

    일본에선 2004년 이후 니트(15~34세의 비경제활동 청년)가 갑자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당시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니트에 대해 ‘너무 풍요롭게 자라 일할 의욕이 없는 게으른 청년’이라고 인식했다. 빈곤이나 사회적 배제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게으르기 보다, 능력이 없어 노동 시장에서 배제(질병ㆍ장애 등 신체적 제약이 있거나 저소득 가정의 저학력인 청년)됐거나 혹은 인간관계의 문제로 인해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니트의 절반 가량은 왕따 등 인간관계 문제를 경험했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橫濱)시에서 만난 청년들은, NPO의 도움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수년간의 니트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다카오카 요시타카(高岡 慶考ㆍ35)는 3ㆍ11 도호쿠 대지진을 계기로 히키코모리를 탈출했다. 2002년 와코대 경제경영학부를 졸업한 뒤 5년 정도 중식당 요리 보조로 일한 다카오카는 직장 동료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일을 관뒀다. 그는 “이후에 취업을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부모님 도움을 받으니 금전적으로도 걱정이 없었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어 니트로 지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과의 대화도 단절되고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히키코모리 3년 차쯤 됐을 때 다카오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고독감을 느꼈지만 막상 사회에 다시 나설 용기가 나진 않았다. 도호쿠 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다카오카는 멍하니 TV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TV속 모습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지진 이후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면서 그는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1주일간 진행하는 봉사활동 캠프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의 삶을 180도 바꿔 놨다.
    다카오카는 “피해지역 주민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게 아니라 ‘더 좋은 마을로 만들자’는 얘기를 했다”며 “긍정적으로 밝은 미래를 그리는 그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또 “히키코모리 땐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는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며 “이를 계기로 사회에서도 어엿한 일원으로 생활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봉사활동 중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20대 이후 한번도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다는 그는 “봉사활동 기간 중 마침 생일이 끼어있었는데, 지역 주민들과 동료들이 조촐한 파티를 열어줬다”며 “어릴 때부터 남들과 소통하거나 함께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불과 1주일 간의 봉사활동 경험은 그를 사회적 기업으로 이끌었고, 현재 지진 피해지역을 지원하는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관계가 작은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미타 쿠니히코(三田 邦彦ㆍ33)는 2000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도, 취업도 포기한 채 니트 생활을 했다. 미타는 “10년간 니트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번 기간은 딱 3개월”이라며 “어떤 일에서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미타를 사회로 돌려보낸 건 부모님의 단호한 대처와 그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시스템이었다. “30살 되기 전에 집에서 나가라”는 부모님 말씀에 인터넷을 뒤져 찾은 곳이 K2인터내셔널이라는 니트ㆍ히키코모리 자활 지원 사회적 기업이었다. 미타는 2010년 자활 프로그램에 등록해 일본과 호주의 시드니를 오가며 다코야끼 가게에서 일했다. 물론 정부 기금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돈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K2인터내셔널에서 운영하는 다코야끼 가게에서 매달 20만엔(194만원)을 버는 어엿한 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 미타는 “K2인터내셔널의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니트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직원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삶이 재미있고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관계, 건조한 사회의 수분이 되다
    “주 3일 근무하고 15만엔(145만5,000원)을 받는 채용 방식을 도입하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지원할까 궁금했어요. 그런데 의외로 고학력자들이 많이 몰려 사회적으로도 파문이 일었죠.” 일본 게이오대 미디어 대학원에서 프로젝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와카신 유준(若新 雄純)은, 일본 사회가 다양한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수의 실험적인 취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경직된 일본의 조직문화가 많은 청년들을 사회에서 도태시키고, 관계를 삭막하게 만든다는 생각에서다. 적게 일하고 적은 급여를 받는 ‘비스타일 채용(느슨한 채용)’ 외에 채용에 운세를 접목한 ‘베쯔루토’(지원자가 일하기 싫은 회사를 체크해 해당되는 회사를 제외한 후, 지원자의 생일 등으로 궁합을 봐서 가장 잘 맞는 회사에서 인턴십 등으로 일을 시작)에는 203명이 지원했는데, 이 중에는 와세다대 10명, 메이지대 6명, 도쿄대와 오사카대 각 4명, 교토대 3명 등 명문대 출신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또 나르시스트 채용(매니악한 사람을 조직 문화에 맞게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역시 고학력층에 인기를 얻었다. 와카신은 “일본은 특별히 부자가 아니어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됐다”며 “이제 청년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나아가 어떻게 하면 인생을 보람 있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즉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돼 있다. 그는 “일본 사회는 풍요롭지만 선택의 폭이 좁다”고 했다. 예를 들면 사회가 정해 놓은 시스템 속에서 취업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회사에 충성해야 한다. 지각하면 안 되고, 남의 눈에 띄면 안 된다. 이런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다고 낙인 찍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의욕도 떨어진다. 와카신은 “일본 청년들은 60점을 목표로 일한다”며 “더 잘한다고 보너스를 받는 것도 아니고, 60점을 밑돌면 혼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와카신은 “이런 사회를 유연하게 만드는 게 내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했다. 사회가 개개인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훨씬 나은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란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인터넷으로 150명의 니트들을 모아 그들 모두가 동등한 이사로 재직하는 ‘니트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서로 아이디어를 모아 자기들 스스로 창의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차원이었다. 모두가 얕보는 니트들이, 세상이 정해놓은 방식이 아닌 그들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동기 부여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들은 지난해 불과 92만엔(892만원)의 수익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매스컴은 이들의 연합 자체에 주목했다. 현재 니트 주식회사 대표를 맡고 있는 나카 요스케(仲 陽介ㆍ26)는 “니트 주식회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개인 능력이나 창의력은 정규직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며 “일반 회사는 명령에 따르는 게 중요하지만, 니트들은 그런 삶을 원치 않기 때문에 취업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니트주식회사에 대해선 “수입이 적더라도 새로운 고용방법이나 사업형태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좋다”며 “니트도 모이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사회에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카의 사례만 보면 와카신의 의도는 적중한 셈이다. 정형화된 고용 시스템에 거부하는 니트의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의욕이 없던 이들에게 확실한 동기를 심어준 셈이니 말이다. 와카신은 “지금 일본 사회는 따뜻하지만 건조한 상태”라고 진단하면 “다양성을 인정하며, 긍정적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일은 건조한 사회에 촉촉하게 수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중 국



    협력의 토양 위에 싹튼 창업

    “취재 오셨어요? 중국 CCTV도 하루 종일 취재하고 있는 중이에요. 아~ 쟤들은 창업자가 아니라 견학 온 중학생들이에요. 여기저기 구경하며 물어보고 다니더니 지금은 자기들끼리 아이디어 짜는 모양이네요.”
    처쿠(車庫)카페 직원인 헬렌 리우(Helen Liu)는 외국 취재진이 낯설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설명했다. 베이징 하이디엔구 중관춘의 창업거리에 있는 처쿠(車庫)카페에는 활기가 넘쳤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얘기하고, 취재진까지 뒤섞인 탓에 시장통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왁자지껄했다.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차고에서 애플을 창업한 것에 이름을 따온 처쿠카페는 2011년 문을 열었다. 개업 초기엔 창업자들이 모여서 아이디어를 나누거나 협업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성격이 짙었으나 이후 투자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민간 인큐베이터 역할까지 아우르면서 가장 인기 있는 창업카페로 꼽히고 있다. 처쿠카페에선 매일 오후 1시 30분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이벤트가 열린다. 이 곳을 이용하는 창업자들이 자신의 사업 아이템을 얘기하거나 진행 경과를 발표하는 자리다. 이날 발표한 난충훼이(南忠辉ㆍ26)는 자신이 개발하고 있는 ‘앱 개발자들을 위한 무료통합 계정 관리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발표가 끝나고 난충훼이가 자리에 돌아오자, 예닐곱명이 몰려들었다. ‘원리가 뭐냐’ ‘무료 서비스면 수익은 어떻게 올리냐’ ‘앱 개발자인데 프로그램 활용하고 싶다’등 궁금증을 묻거나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다.
    이런 모습은 발표 후 더 활발하지만, 새삼스러운 풍경은 아니다. 처쿠카페에서 만난 한국인 천예지(27)씨는 타국에서 한국말을 듣자 반가운 듯 먼저 알은체를 했다. “아시아 사람들이 맘껏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 카페를 만드는 게 목표”라는 천씨는 “함께 시작할 중국 친구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이어 “이곳 창업가들의 활발한 교류에 감탄했다”고 했다. “창업 준비 하냐, 아이템은 뭐냐,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물어오는 통에 귀찮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천씨는 “처쿠카페에서의 경험은 특별하다”며 “제 잇속만 차리기 보다 서로 돕고 의견을 나누는 데 적극적인 이 곳 사람들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차고에서 만난 창업자들

    샨시(山西)성 출신인 난충훼이는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했다.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다 인터넷 강의 앱에 관심이 생겨 여기(처쿠카페)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창업에 뛰어들면서, 마윈도 나처럼 영어를 전공했다는 얘길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며 “알리바바나 텅쉰처럼 중국의 경제발전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성장하는 회사들을 보면 나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처쿠카페의 장점을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중훼이는 “창업자들끼리 모여 있다 보니 분위기나 정세 파악이 용이해 앞으로의 사업 구상에 뭐가 필요한 지 느낄 수 있다”며 “샤오미의 성공 비결 역시 시장이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처쿠카페에서 배운 장점들을 살려 꼭 성공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왕쉬거(王徐葛ㆍ27)는 베이징공업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2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앱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이템은 택배 보관함을 스마트폰과 연동시킨 ‘스마트 캐비닛’. 왕쉬거는 “처쿠카페엔 나처럼 일상생활을 앱과 연결시키는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들이 많아 얘기를 나누면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며 “또한 이 곳을 찾는 창업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어 더 힘을 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지금은 수입도 없고 진전도 더디지만, 가능성 있는 아이템인 만큼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각자도생을 넘어서…

    중국판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중관춘에는 2만여개의 연구소와 기업이 밀집해 있다. 중관춘에서 창업해 전 세계 주요 증시에 상장한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2013년 말 기준 2조523억위안(약 368조원)으로 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액수다.
    중관춘이 창업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쿠카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각자도생의 경쟁에서 탈피해 협력을 통해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협력 시스템’은 새내기 딱지를 뗀 주니어 사업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남이 잘 돼야 나도 잘 된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주요 지역마다 지명에 ‘소호(SOHOㆍ small office home office)’를 붙인 대형 빌딩이 있다. 오피스와 상업시설이 결합된 소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없던 건물들이다. 중국의 창업 열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호는, 창업자들에겐 소비자와 투자자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접점을 제공한다.
    베이징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번화가인 차오양구 싼리툰(三里囤)에도 소호가 있다. 싼리툰 소호의 사무실 임대료는 월 3,000~4,000위안(54만원~71만원)으로 일반 오피스에 비해 약간 비싸지만, 이 곳에 들어선 소규모 회사들은 젊은 소비자들과의 스킨십은 물론 집적 효과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창업 6년 차인 장시빈(张喜彬ㆍ30)은 프로그래머와 회사를 연결해 주는 구인구직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원래는 직접 회사의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했지만, 수요가 많아지자 인력수급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2014년에 아예 인력과 수요를 연결시켜주는 헤드헌팅에 진출하기로 한 결정한 것이다.
    장시빈은 싼리툰 소호에 사무실을 낸 이유에 대해 “우리처럼 작은 회사들이 많이 입점해 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나 협업에 용이하다”며 “여기는 미디어가 관심을 갖고, 투자자들의 왕래도 잦은 곳이기 때문에 투자나 홍보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협업의 필요성을 절감한 건 대학 시절 창업에 실패했던 경험 덕분이다. 장시빈은 “알리바바와 타오바오와 같은 인터넷 쇼핑사이트가 갓 인기를 모을 때, 비슷한 사이트를 만들었지만 결국 실패했다”며 “주변의 조언과 도움 없이 나 홀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실패 후 재기랄 것도 없었다. 경험을 통해 배운 걸 거울 삼아 그냥 다시 하면 그만이니까. “창업에 한 번 실패했다고 문제될 건 없어요. 그냥 다시 하면 됩니다. 처음 창업할 때도 빈 손으로 했는데, 두 번째라고 뭐 대단히 다를 게 있나요.” 그리고 그는 지금 직원 100명에 1년 매출이 2000만위안(36억원)에 이르는 회사의 주인이 됐다. 그리고 그는 소호라는 날개를 달고 중국 최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명, 소호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창업가를 만났다. 1인 사무실을 임대하고 있는 지앙잉카이(姜英才ㆍ32)는 최근 자신의 회사가 합병을 해서 도심에서 먼 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투자자나 파트너들과 만나기 쉬운 이 곳에 따로 사무실을 얻었다고 했다. 다른 창업자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은 그에겐 쓸모 있는 부록이다. 지앙잉카이는 2009년 베이징항공항천대 전기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플래시 디스크 제조업체를 차렸다. 그리고 지난해 1월에 인터넷 회사와 합병해, 스마트폰 화면을 그대로 TV 등 대형 모니터에 연결해 주는 변환 장치를 만드는 ‘트랜스패드’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지앙잉카이는 “집이든 버스정류장이든 스마트폰만 있으면 모니터에 연결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 한 국



    누가 ‘각자도생’을 진리로 만들었나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사측의 발언이 아니다. KTX 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대한 평범한 대학생의 반응이었다. 이는 비단 학생 한 명의 생각이 아니라, 다수의 청년들이 공유하는 인식이다. ‘나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이 고생을 하는데, 그런 고생도 하지 않은 비정규직이 막무가내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게 오늘날 20대 대학생들의 생각인 것이다. 대학 강사인 오찬호씨가 2013년 출간한 저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소개한 이 사례는 청년들의 공감 능력이, 상생의 의지가 얼마나 희박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씨는 책의 머리말에서 “대학에서 만난 20대들은 살벌한 경쟁 자체를 모범적인 삶으로 이해한다”며 “이들은 경쟁우위를 점하기 위한 어떤 차별도 서슴지 않는 걸 공정하다고 여긴다”고 썼다. 2015년의 한국의 화두였던 ‘헬조선’과 친구처럼 붙어 다니는 말 중에 ‘망한 민족’과 ‘죽창’이라는 것이 있다. 망한 민족은 자기 비하와 함께 유체이탈화법이라 불리는 타자화된 현실인식이 묘하게 결합된 것이고, 죽창은 불평등이 팽배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평등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죽창 앞에선 모두 평등하다’는 논리는 때론 연대 투쟁과 등가를 이룬다. 하지만, ‘한국이 못 나가는 건 내 잘못이 아니고, 현실이 팍팍할수록 내 살길을 찾는 게 진리’라는 각자도생의 가치에 매몰된 청년들에게 죽창의 가치는 그저 폭력적인 가십성 구호에 그칠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지난 가을 한 칼럼에서 아직도 연대하지 못하는 한국 청년들에 대해 “많은 청년들은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아직까지 각자의 노력이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며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 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한다는 사실을 앞으로 몇 년간 더 확인해야 연대를 통한 사회 변화 외엔 살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 유튜브 In a Nutshell – Kurzgesagt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청년들이 스스로 이런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이런 가치관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한 청년 연구가는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이 각기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건 사회가 설정한 가치와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며 “청년 문제란 청년에게 문제가 있단 뜻이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사회의 책임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뜻이다.

    ‘무중력’과 ‘유유자적’의 작지만 큰 차이

    물론 모든 청년들이 각자도생의 극한 경쟁이란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하릴없이 치열한 경쟁을 감수하지만, 그 와중에 자기만의 삶의 속도를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인디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사회적 기업인 ‘유유자적 살롱’(유자살롱)은 탈학교 청소년들의 사회성 회복을 돕고 있다. 유자살롱의 공동대표인 이충한씨는 “한국 사회는 학교, 직장, 가정 등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 없는 무중력 상태인 동시에 사회와 제도는 과도하게 간섭하고 무리할 정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과중력 상태”라고 진단했다. 즉 극심한 사회적 압박의 반작용으로 무중력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지향점은 적정한 중력장이 작용하는, 각자의 템포와 가치에 따라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사회에 있다. 그는 “탈학교 청소년을 포함한 니트ㆍ히키코모리와 능력자는 사실 한 끗 차이”라며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적절한 중력장을 만들어 주면 그들은 오히려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적절한 중력장’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유자살롱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인 ‘직딩예대’(바쁜 일상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직장인들이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를 수료한 이발사(27ㆍ유자살롱에선 평등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름 대신 별명을 쓴다)의 사례가 해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교대에 진학한 건 맞지만, 대학 친구들은 임용고시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 같았어요. 전 그저 제가 마음 가는 대로 음악도 하고, 딴 생각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학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이번엔 또 쓸데없이 뭐하고 있니?’ 라고 여기는 것 같았어요. 자연히 전 교대에 다니는 내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이발사는 외로웠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그가 찾은 돌파구는 또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나섰고, 유자살롱과도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유자살롱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ㅇㅇ’이란 이름의 밴드도 만들었다. “제게 제일 중요했던 건 그냥 제 마음을 알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거였어요. 그리고 운 좋게 ‘나도 그랬어’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위안을 얻었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숨 쉴 구멍이 생기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초등학교 교사인 이발사보다 훨씬 팍팍한 삶을 사는 청년들은 부지기수다. 이발사는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 지 알기 때문에 위로나 조언은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끈만은 절대 놓지 않길 바랐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관계가 아닌, 조금은 느슨하고, 완벽할 필요도 없는 관계. 그리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좋은 에너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발사가 그랬던 것처럼 무중력 상태에서 부유하는 청년이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지나치지 않은, 아주 작은 인력’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